‘스스로 그러하게 살라’는 소통의 메시지

Buddha in Comic & Ani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2014-10-13     신성민 기자

인간의 탐욕과 갈등때문에
상처받은 자연의 아픔 그려
결국 ‘대지의 母性’이 치유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포스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인간의 탐욕으로 상처받은 자연과 이를 치유하는 모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간이 문명이라는 것을 발생시키고 살아오면서 자연환경에 대한 ‘개발’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19세기 서구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풍족함을 전해 줬지만, 자연에게는 수많은 상처를 내왔다.

일본 애니매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같은 산업 문명에 대한 적확한 비판을 작품에 담아내 왔다. 특히 그가 다카하시 이사오와 함께 설립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첫 작품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라는 것과 은퇴를 선언하며 선보인 작품이 ‘모노노케 히메(1997)’라는 것을 보면 그가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지 알 수 있다. 그에게 두 작품은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로서의 알파이며 오메가인 셈이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초기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연관에 대해 여실하게 보여준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거대 산업 문명이 붕괴하고,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 지구는 황폐해진 대지와 썩은 바다로 뒤덮혀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부해(腐海)라고 불리는 유독한 독기를 내뿜는 균류의 숲이 확장되면서 인류 제2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이제 지구상에 남은 건 독성의 균사를 내뿜는 곰팡이들과 ‘오무(왕충)’와 같이 거대하게 변질된 곤충류들, 그리고 독을 품은 자연과 맞서 바람계곡에서처럼 여기저기 살아가는 극소수의 인간들뿐이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더불어 자연을 지배하려 들지 않고, 자연과 교감하며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나우시카와 마을 사람들은 퍼져가는 부해의 숲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나름대로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악명 높은 군사국인 토르메키아 대형 비행선이 거대한 곤충들에게 습격을 당한 채 바람계곡에 추락하게 되고, 불타버린 비행선에는 불의 7일동안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태워버린 무시무시한 거신병의 알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신병’의 알을 되찾으려는 ‘토르메키아’ 함대가 바람 계곡으로 들이닥치고 이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바람 계곡을 점령하게 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자연과 세계의 근본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 자연은 인간이 파괴한 대지를 스스로 치유한다. 인간의 관점으로 보기에는 독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정화이자 재생의 메카니즘인 것이다. 마치 인간의 몸에 병균이 들어오면 면역 항체가 생겨나 병균을 이겨내는 것과 흡사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독을 생산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포자식물들이 오염된 지구를 정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 중심의 사고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많은 평론가들은 주인공 나우시카가 체제와 맞서 싸우는 주체적 여성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에코 페미니즘(Eco-Feminism)’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에코 페미니즘은 자연생태계와 인간을 하나로 보고, 지금까지 남성중심·서구중심·이성중심의 가치와 삶의 방식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황폐화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뒤바꾸려는 사상이다.

실제로 일본의 생명윤리 과학자인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대담집 <남성은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까>에서 “나우시카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력으로 행동하는 자립한 소녀”라며 “그녀는 성적으로 미성숙하지만 자신의 발로 자립해 일어나고 순진하고 과감하면서도 사랑스럽고 그윽한 에로스를 지니고 있다”고 평한바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스스로 ‘자신의 역작’이라고 자평했던 ‘모노노케 히메’에서의 여주인공은 자연의 편에 서서 인간문명과 대립하는 여전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나우시카와는 정반대로 ‘모노노케 히메’의 주인공 ‘산’은 귀면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모노노케 히메’의 이야기는 아시타카가 살고 있는 에미시 일족의 마을에 타타리가미(재앙신)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인간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가득찬 타타리가미는 마을로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시타카는 활을 날려 그를 쓰러뜨리고 그 대가로 오른팔에 죽음의 각인을 받게된다. 아시타카는 자신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서쪽의 시시가미(사슴신)의 숲으로 떠나게 된다. 서쪽의 시시가미의 숲에서는 타타라바(철을 만드는 마을)의 지도자 에보시와 들개신 모로·그의 딸 모노노케 히메 ‘산’이 대립 중이었다.

▲ 미야자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의 스틸 컷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 대표적으로 보여지는 불과 물의 이미지의 상충은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이뤄진다. 에보시가 이끄는 타타라바는 철을 제련·생산해 마을 경제를 이끌어 나간다. 또한 이들을 이 철로 화승총을 만들어 동물신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아시타카의 마을에 난입한 멧돼지 신이 재앙신이 됐던 이유도 화승총 탄알이 몸에 박혀 썩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시시가미의 숲에서 시시가미가 기거하는 곳은 숲의 중심에 있는 호수이다. 에보시의 마을에서 총상을 입은 아시타카는 이 호수에서 상처를 치유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보다 ‘모노노케 히메’는 각 캐릭터 간의 관계가 좀 더 중첩적이고 디테일하다. 산을 망치는 인간들을 증오해 없애려고 하는 짐승신들·이에 맞서 싸우며 여자와 병자들이 잘사는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 에보시·타타라바 마을의 철을 뺏기 위해 시시때때로 공격하는 막부·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아시타카 등 이들은 작품 내에서 각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 뿐이다.

불교에서 자연관은 법성을 본성의 원리로 하고 법계를 전체의 범위로 하고 있다. 결국 천지와 나는 한 뿌리이고, 정신과 물질은 둘이 아니니, 만물과 나는 한 몸인 것이다. 땅의 인연으로 나타난 생명은 결국 땅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이는 유정·무정 만물에는 불성이 있다는 ‘처처불상 사사불공’과도 맞닿는다.

<조당집>에서 중국의 고승 조주선사는 나무에게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긍정한다. 초목이 법신이라고 했으니 초목에도 불성이 내재돼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이같은 불교적 자연관이 자연과 인간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라고 역설한다. 관음보살의 현현처럼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나우시카나 자연과 인간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주도하는 아시타카는 자연 순환의 진리를 안 선각자이다. 이 둘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실천한다.

그 안에서 ‘스스로 그러하게’사는 것,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놔두고 사는 것. 이것이 두 작품에서 던져주는 자연과 소통하는 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