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스승, 그리고 삼보에 효순(孝順)하며 지극한 진리에 효순하라.
〈범망경〉
약관을 기억하라
또한 약관을 읽어보고서 가입하더라도, 이내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많은 것 같다. 내가 어떤 조건으로 어떤 약속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일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매우 유사한 경우가, 수계(受戒)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수계는 계를 받는 일이고, 그 계의 조목을 잘 지키겠노라 부처님과 약속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 계율의 조목이 어떠한 내용인지를 잘 알아야 함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절마다 가끔은 보살계를 수계하는 법회를 연다.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부터 계율을 받을 때, 우리 모두는 “잘 지키겠습니다”라고 맹서를 한다. 하지만 도대체 지켜야 할 그 내용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나 있을까? 오계나 십선계와 같이 짧은 계율은 외울 수 있지만, 보살계와 같이 총 58개나 되는 긴 계율의 경우에는 그 조항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계율을 자주자주 읽어보고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다. 알지 못한다면, 지킬 수도 없을 것이다.
하필 효라니?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보살계는 〈범망경〉 하권에서 설해지고 있다. 계율을 설하는 계경(戒經)이라서 그런지, 또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보살계를 제정하신 것이라 말하는 것 아닌가.
연기의 이치를 관찰하셨다든가 혹은 〈화엄경〉을 설하셨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어왔지만, 계율을 제정하셨다는 이야기는 잘 듣지 못하던 이야기다. 그러니까 교단 구성원들이 어떤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그런 일은 하지 말라”라고 하시면서, 계율을 하나하나 제정하셨다는 종래의 정설(定說)과는 다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또 있다. 그 보살의 계율이 무엇인지를 연이어서 설명하는 말씀이 특이하다. “부모와 스승, 그리고 삼보에 효순하며, 지극한 진리에 효순하라”고 하신다. 효라? 하필 효인가?
다 알다시피, 효는 유교의 윤리규범이 아닌가. 왜 여기서 효가 나올까?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부모님께 효순하라”고 할 때의 효가 어찌 하필 유교에만 있는 것이겠는가. 인도의 힌두교에서도 있고, 인도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인류 보편의 윤리 감정이 아닐까 싶다. 자식이 부모님을 잘 모신다는 것은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의 효라면 무엇이 문제될까. 내가 ‘가족윤리로서의 효’라고 이름한 것도 그런 것이다. 그러한 효는 분명 우리 불교의 경전에서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초기경전인 〈선생경(善生經)〉에서이다.
그런데 여기 〈범망경〉에서 설하는 ‘효순’의 의미는 다만 그러한 ‘가족윤리로서의 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효순의 대상에 ‘부모’가 있는 만큼, ‘가족윤리로서의 효’가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효순이라는 말이 쓰이는 맥락을 살펴보면, 그 말의 뜻에는 다만 ‘효도’만의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수순(隨順)한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보살은 효순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설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효는, 이제 모든 중생을 향하고 있는 ‘열린 개념’으로 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