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은 모든 중생의 불청지사不請之師이다.

2013-11-15     김호성 교수

거리로 나가는 스승

▲ 그림 박구원
이 〈무량의경〉에서는 ‘스승’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지만, 다른 경전들에서는 ‘벗’이라고 부르는 말이다. 불청지사가 곧 불청지우(不請之友)이고, 불청지우가 곧 불청지사다. 스승이 벗이고, 벗이 곧 스승이기 때문이다.

오늘 생각해 보는 이 구절의 바로 앞에는 “보살은 모든 중생의 참다운 선지식이다”라는 말도 나온다. 그 선지식이라는 말은 스승을 일컫는 말이지만, 동시에 선우(善友)라고도 번역된다. 이렇게 스승과 벗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스승은 제자에게 벗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같다. 명색이 스승이라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권위주의에 대한 경계를 ‘불청지사’라는 말은 담고 있는 것 아닐까.

벗이 될 때, 비로소 그 스승은 제자와 동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행은 앞에서 이끄는 것도 아니고, 뒤에서 밀어주는 것도 아니다. 나란히 서서 함께 걸어간다. 사제동행(師弟同行)이라는 말이 그 뜻이다.

제자로부터 “스승님, 저랑 함께 나란히 걸어가시죠”, “스승님, 저에게 가르침을 주소서”라고 청탁을 받을 때는 이미 늦다. 청탁을 받고나서야, 제자에게 다가가는 스승이라면 ‘불청지사’라 할 수는 없다. 청탁을 받지 않더라도, 늘 살피고 있다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더라도, 제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탁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 그분이 참스승이다. 우리 부처님은 중생들로부터 “법을 설해주소서”라는 청탁을 받지 않으셨다. 그 전에 스스로 녹야원으로 길을 떠나셨던 것이다. 이 모습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전범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청탁받기 전에, 청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서 중생을 찾아가고 있는가? 혹시나 거룩한 법석(法席)을 장만해 놓고, “여기 오셔서 법을 설해주소서”라고 누군가 청해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그럴 때 가서 법을 설하는 것만으로 포교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무대가 마련되기 전에 ‘거리’(=중생이 있는 곳)로 나가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고 있는가?

 

사회복지의 기본원리

‘불청지사’라는 말에 ‘스승’이라는 개념이 있으므로, 우선 스승과 제자, 법을 전해 주려는 보살(포교사)과 법을 전해 받는 중생(대중)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 말은 반드시 거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은 재물을 나누는 보시에도 적용가능하다. 누군가로부터 청탁을 받고서야 재물을 나누어 준다면 이미 늦다. 그것은 진정한 보시라고 할 수 없다. 청함을 받기 전에 나누는 것이 진정한 보시이다. 진정한 보시는 상대방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자비 위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타이완의 동부 도시 화련(花蓮)의 어느 병원에서 원주민 임산부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젊은 비구니 스님이 있었다. 그 원주민 임산부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진료를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당시 그 원주민 임산부는 그 스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참상(慘狀)을 목도한 스님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자비심을 일으켰다. 그리고서는 “돈이 없어서 의료혜택을 못 받는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서는, 구제활동에 뛰어든다.

자제공덕회의 정옌(證嚴)스님 이야기다. 지금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국제구호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단체이지만, 처음 시작은 그렇게 발단된 것이다. 2011년 자제공덕회 견학을 갔을 때, 나는 스님께서 강설(講說)하신 〈무량의경〉을 발견했다.

〈무량의경〉을 통해서, 스님은 자제공덕회에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정신무장을 하고 계셨다. “청하기 전에 다가가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