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信相보살이 그날 밤 꿈에 금고金鼓를 보았다.
〈금광명경〉
꿈은 꿈이 아니다
“그 모양은 지극히 크고, 그 밝음이 두루 비추기를 마치 햇빛과 같았다. 다시 그 빛 속에는 시방세계의 끝이 없고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많은 보배나무 아래의 유리좌(琉璃坐)에 앉아계시는 것이 보였다. 한량없는 백천의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부처님들께서는 법을 설하시고 계셨다. 바라문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당목(撞木)으로 금고를 쳐서 큰 소리가 나게 하였다. 그 소리는 ‘참회의 시’를 설하는 것이었다.”
꿈 속의 일이다. 생시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생시의 일이 아니라 해서 내팽개칠 수 없는 진실한 이야기가 있다. 금으로 만든 큰 북을 보았고, 그 금북으로부터 나오는 빛 속에서 부처님을 뵈었기 때문이다. 빛이라는 것이 한 줄기로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실제로는 그 빛의 줄기마다 수많은 부처님들께서 유리좌에 앉으셔서, 수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설하시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그보다 더욱더 생시와 같은 일은 한 바라문처럼 생긴 사람이 친 북소리에서 흘러나온 ‘참회의 시’이다. 잠들기 전, 신상보살은 ‘참회의 시’ 중에서 한 구절도 기억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꿈속에서 듣고서는, 그 내용을 다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금광명경〉 참회품에 실린 이 게송은 매우 긴 장시(長詩)이다. 이 긴 시를 다 기억해 낸 것이다. 실제 우리들도 체험하지 않는가. 대개의 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든가 충격적인 내용은 기억할 수 있지 않던가.
효봉 스님 역시 꿈 속에서 고려말의 고봉(高峰)스님이 설해주시는 게송을 받아왔지 않던가. 지금 〈효봉어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 꿈이 언제나 허망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소리
꿈에서 받은 ‘참회의 시’는 물론 꿈이 아니라 생시에 설법을 들은 것으로, 경전의 편집자는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한 금고가 아니라 바로 부처님의 금구(金口)로부터 설해진 것이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역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대승경전을 읽을 때 이 형식이 주는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재미는 반감될 것이다.
북을 치면 소리가 난다. 종도 마찬가지다. 소리가 난다. 북이나 종 뿐이던가. 소리에 신비한 힘이 있음은 예전부터 믿어오던 바이다. 다라니가 어떤 권능을 갖고 있다고 믿어지기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금고경〉 역시 마찬가지 입장을 견지한다. “이 큰 금고에서 나오는 묘한 소리는 삼세의 모든 고통을 다 소멸시켜 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뒤에서는 그 소리가 ‘참회의 시’를 읊고 있으므로, 그 ‘참회의 시’에 따라서 참회할 때 모든 고통이 다 소멸된다고 하지만 말이다. 그 전에 먼저 소리 그 자체의 신비한 공능(功能)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소리에 힘이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양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내 나름으로 답을 찾아본다면, 소리가 우리 ‘밖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 “안에” 있지 않아서가 아닐까.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대개 번뇌가 아니던가. 지금도 내 머리 속을 달리는 생각들, 그것들은 바로 번뇌 외에 무엇일까.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안의 번뇌에 끊임없이 사로잡힐 것이다. 그렇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특히 아름다운 소리는 우리를 우리 안의 소리로부터 놓여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