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 법에 따르기 위해 이와 같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니라 ‘외도’를 어찌할까?
〈열반경〉
그러니까 불교 이외의 가르침은 ‘외도’가 된다. 그러면, 불교는? ‘내도(內道)’가 되겠지.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 불교를 ‘내도’라고 부르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내 과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 다만 불교 이외의 책들을 ‘외전(外典)’이라 할 때, 불교 책을 ‘내전(內典)’이라 부르기는 한다.
우리의 불교사는 외도, 외전과 어떻게 인연을 맺어왔던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살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외도와의 관계정립은 하나의 숙제인 셈이다.
물론, 순수하게 불교 그 자체만을 공부하고, 닦아가면서 외도 같은 것은 전혀 신경 쓰지 말자는 태도도 있을 수 있다. 이는 불교가 최고의 가르침인 이상, 불교 하나만 공부하면 되었지 다른 것이 무엇 때문에 더 필요한가라는 입장일 터이다.
정말 그래도 좋을까? 〈열반경〉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신의 사원으로 들어가서, 나로 하여금 저 자재신(마헤수라)에게 보였는데, 자재신이 나를 보고서는 합장하여 공경하며 한쪽으로 물러나서 서있었느니라. 나는 이미 한량없는 세월 동안 그렇게 신의 사원에 들어가는 법을 떠났으나, 세간의 법에 따르기 위하여 이와 같은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떠났으되, 따른다
외도의 법, 예를 들면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힌두교의 신인 자재신(自在神, Mahe?vara)을 모신 사원에 들어가서 보이는 일은 당시의 풍습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 아기를 ‘보인다’는 말은, 아기가 자재신을 참배케 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럼으로써 신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원망(願望)이 숨어 있는 것이다.
부처님 역시 그렇게 했다. 그 일에 대해서,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새삼스럽게 해석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외도일 수밖에 없는 힌두교의 신을 참배해야 할 만큼, 힌두교에 대해서 믿음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금생에 다시 아기로 태어나셨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미 과거의 한량없는 세월 동안 수행을 통해서 그보다 더 높은 진리를 깨치셨던 것이다.
그렇기에 힌두교의 신에게 참배를 할 필요는 사실상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는 힌두교의 자재신을 모시는 사원에 참배를 하였다. 그 이유는? “세간의 법에 수순(隨順)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불교의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닐까.
불교는 다른 문화와 접촉할 때, 그 선행하는 문화를 깨부수고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 문화를 존중하면서, 조화를 이루면서 불교를 넓혀 갔던 것이다. 중국에서든, 우리나라에서든, 일본에서든 다 그랬다.
왜 그랬을까? 그 선행하는 문화, 즉 외도 역시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해서이다. 그 의미는? 바로 최고의 진리는 아닐지라도, 세간적 차원에서 볼 때는 의미있는 진리(세간의 법, 속제)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법을 버리고, 그 보다는 더 높은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간의 법을 존중하고 따르는 태도가 바로 불교의 ‘중도(中道)’일 것이다.
〈열반경〉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물어보고 싶다. 혹시 우리는 불법의 진리다움에, 그 높이에 젖어서 세간의 법을 무시하거나 배척해 온 일은 없었던가? 세간의 법을, 다만 세간의 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