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약은 독이기도 감로이기도 하다

〈열반경〉

2013-10-15     김호성 교수

만병통치약은 있는가?

▲ 그림 박구원
어떤 나라에 의사가 있었다. 어떤 환자가 오든 단 하나의 약만을 처방하는 의사! 그 약은 유약이다. 우유로 만든 약일 수도 있고, 우유 그 자체가 약으로 쓰였을 수도 있겠다. 그 의사에게는 유약이 만병통치약이다.

그러한 의사가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으려면 그에 걸맞는 어리석은 통치자가 있어야 한다. 왕 역시 어리석었다. 그래서 늘 그 의사를 믿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진실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 시절 역시 그랬다. 진실로 의학을 익히고 닦은 의사가 없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은 순간, 그는 하산(下山)을 결심한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의사를 찾아간다. 하지만 대뜸 의술을 뽐내는 대신, 의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 문하에 제자로서 들어간 것이다. 역시 그랬다. 엉터리 의사가 정도(正道)의 스승일 수가 있겠는가. 48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시봉(侍奉)을 잘 한다면, 그 이후에 의술을 가르쳐 주겠노라 말한다. “좋습니다.” 라고 하면서, 진짜는 가짜 밑에서 몸을 낮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왕이 의사를 불렀다. 다행인지, 그는 제자를 데리고 갔다. 비서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 의사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왕에게 진정한 의술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비로소 왕은 가짜 의사를 추방할 수 있었다.

이제 진짜 의사가 어의(御醫)가 되었다. 그의 부탁 : “온 나라에 유약의 복용을 금하게 하소서.” 왕은 의사 말을 따랐다. 그런데 어느날 왕이 병들고 만다. 왕을 진찰하고 난 뒤, 의사가 내리는 처방은 놀랍게도 “유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의사는 왕을 속이는 것인가, 놀리는 것인가?

항변하는 왕에게, 의사는 대답한다. “이 유약은 독이기도 하고 감로이기도 합니다.”

 

흔들리는 해답

종교, 라는 말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종교적 진리가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내가 믿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이 가장 높은 진리라고 믿는 데서부터 종교신앙은 출발한다. 신앙의 깊이는 이 믿음의 확실성이나 절대성의 높이에 정비례한다.

종교적 믿음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성격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덧 독선적인 도그마에 빠지게 된다. 우리 중에는 그러한 독선적 성격이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과연 그럴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불교 밖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불교에 대한 이미지 중에는, “불교는 독선적이지 않다. 그래서 좋다”는 것이 있다. 물론 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사상적으로는 열려있는 종교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도 그런가? 나와는 다른 타자(他者)를 수용하는 개방성이 아직은 불충분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멀리 다른 종교나 가르침과 비교할 것도 없다. 같은 불교 안에서도, 자기가 믿고 있는 신념, 자기가 좋아하는 경전, 자기가 선호(選好)하는 수행만이 참된 것이라 여기면서 ‘만병통치약’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없는 것일까? 만약 없지 않다면, 언제나 유약만을 제시한 저 가짜 의사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열반경>은 이 비유를 통해서, 유아(有我)와 무아(無我)가 배타적이거나 선택적인 것이 아님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상대의 병(근기)을 고려하면서 다양한 약(가르침, 수행법)을 처방해야 한다는 다원성 내지 개방성에 대한 강조로 읽고 싶다.

그러한 다양성 내지 개방성은 얼마나 나약하게 보이는가. 믿음이 약해서 그렇다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 보다는 흔들리는 속에서, 보다 진실한 해답의 추구가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