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청정한 마음이 번뇌에 의해서 오염된다

〈승만경〉

2013-09-06     김호성 교수

인간의 얼굴

▲ 그림 박구원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말은, 실제로는 어느 신전에서 얻은 신탁(神託)이라 한다. 이 말을 듣고서, 소크라테스는 깊이 깊이 스스로를 성찰해 보았다. 그 결과, 그는 ‘무지(無知)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받은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원죄(原罪)는, 그 죄인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스스로는 빼낼 수 없는 생선가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절대자 신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길을 유일의 구제책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무엇이라 대답할까? 나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불교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처!” 그렇다.

불교에서는, 우리 자신이 부처라고 말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산천초목도 다 부처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대답이나 예수의 대답에 비한다면, 불교는 훨씬 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나는 부처다”, “우리는 부처다”. 이렇게 말하는 불교인은 얼마나 될까?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불교에서는 인간이, 중생이 사실은 다 불성을 갖춘 부처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평소에 현실의 삶 속에서 “그래, 그렇다. 나는 부처다.” 이렇게 말하지 못하고, 부처로서의 삶을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라는 것은 ‘속’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현실적으로는, ‘겉’으로 볼 때는 그렇지 못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겉’으로는 수많은 번뇌에 오염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게는 이러한 이중구조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인식이 가장 타당한 인간이해가 아닌가 싶다. 본래 청정한 부처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번뇌의 중생이고, 현실적으로는 번뇌의 중생이지만 실제로는 부처라는 것. 그러한 이중구조, 어쩌면 모순 속에 놓여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

 

모순 속의 삶

인간의 이중구조, 혹은 모순을 <승만경>에서는 여래장(如來藏)이라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중구조 속에서 어느 한 편에 초점을 두면서, 다른 한 편을 포섭하는(혹은 이해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예컨대 선(禪)은 본래 청정한 측면에 초점을 두고서 수행법을 제시한다. 그 반면에 정토신앙은 오염에 초점을 두고서 수행법을 제시한다.

물론 선이라 해도 오염의 측면을 고려하는 선이 있다.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선이 그렇다. 돈오는 본래 청정을 깨닫는 것이지만, 점수는 현실적인 오염이나 번뇌를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제어해 나가자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타력신앙이라 말해지는 정토신앙에서도 본래 청정함을 말하는 입장이 없지도 않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은, 중생이 부처님께 구원을 청하는 소리가 아니라 본래 청정한 아미타불인 내가 내 속의 아미타불을 부르는 소리라는 것이다. 이른바 자성미타(自性彌陀)설이 그러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불교의 사상이나 수행법이 결국은 “인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에 근거하여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양한 진폭 속에서 자기 길을 발견하여 걸어가는 것, 그것이 수행일 것이다.

청정과 오염, 불성과 번뇌의 이중구조는 모순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모순은 통일을 요구한다. 하지만 섣부른 통일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을 외면하거나 정도 이상으로 축소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뜻하지 않게, 모순된 존재로서 모순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인식 그 자체가, 지금은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모순의 직시, 모순된 나 자신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이미 수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