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낸다든지 해친다든지 하는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승만경〉
명언(名言) 제조기
우리가 지금 ‘경(經)’으로 옮기고 있는 ‘수트라(su-tra)’라는 산스크리트 단어 역시 그러한 의미의 말이다. 아주 간략한 경구(警句)를 ‘수트라’라고 한다. 너무나 짧아서, 도저히 그것만으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주석서가 필요해 진다. 주석서가 탄생하는 배경이다.
그러한 명언들을 좀 찾아서 대중화시켜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기획의 성패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들의 평가가 있으리라 보지만, 실로 경전은 명언의 보고(寶庫)임을 나는 새삼 느끼고 있다. 경전 자체가 ‘명언 제조기’에 다름 아니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 불교사의 많은 스님들 역시 명언을 남긴 분들이다. 그 중에, 내가 참으로 기이(奇異)하게 생각하는 ‘명언 제조기’는 신란(親鸞)스님이다. 오늘 우리가 읽는 명언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신란 스님의 명언이 있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 그대의 눈 앞에서 누군가가 그대의 아이를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는 그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놀라운 말씀 아닌가?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만약 불교에서 “사형제도를 반대한다”고 한다면, 그 근거로서는 이 이상 더 명확한 것이 있을 수 없다. 〈법구경〉에서도, “원한은 원한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 원한을 잊음으로써만 원한은 갚을 수 있다”고 하셨지만 ….
이 부처님 말씀의 의미를, 신란 스님만큼 더 분명하게 주석한 분은, 내가 아는 한, 없다.
전쟁의 심리학
화를 내는 마음, 이를 우리 불교에서는 세 가지 독한 마음(三毒)의 하나로 일컫는다. 진심(嗔心, 瞋心)이 그것이다.
우리는 진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진심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듣고 말하곤 한다. 불교에서는 늘 그렇게 강조해 왔다.
그런데 유감인 것은, 그것을 항상 개인윤리의 차원에서만 말해 왔다는 점이다. 진심을 포함하는 세 가지 독한 마음을 버려야 열반에 들 수 있다는 식으로만 말이다.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인간은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서도, 세계로서도, 인류로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런 점에서, 승만부인의 서원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중생에 대하여 화를 낸다든지 해친다든지 하는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은 사회윤리, 혹은 세계윤리의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그 점은 좀더 분명히 의식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테러, 그리고 학살 등은 우리 인류의 역사가 진보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못해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류의 지식들은 충분히 발달했지만, 우리들 마음 속에서 “화를 내는 마음”은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일어나는 폭력들은, 전쟁들은, 탐욕도 탐욕이지만, 그 보다는 오히려 “화를 내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일어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화를 내는 마음”을 내다버리는 것은, 바로 전쟁을 예방하는 일로 연결된다. 그럼 악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옳은가? 화를 내는 대신,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자. 그리고 안타까워 하고, 염려하자. “화를 낸다든지, 해친다든지 하는 마음”의 포기를 우리 불교만큼 명확하게 설하는 가르침이 또 어디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전쟁이나 폭력에 대하여 불자들만큼 더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없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