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변적 강의… “의역하면 불조 뜻 어긋나” 직역고집

방산굴의 無影樹 〈15〉 탄허 스님 탄신 100년 증언- 월주 스님

2013-06-03     대담=김광식 교수(동국대)

월주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역임, 지구촌공생회 이사장 영화사 회주, 금산사 조실
청담 스님 “탄허 종보적 존재”
동국대 강의 때 명사들 청강
틈만 나면 참선…모든 것 禪으로 귀결
교육에 지대한 관심 가져

-스님도 탄허 스님과 인연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언제 처음으로 뵈었는가요?
탄허 스님을 뵌 것은 통합종단 출범(1962) 이전, 선학원에서 뵈었고 조계사에서도 뵈었어요. 조계사에서 뵐 때에는 여름의 오후였는데, 조계사 주지인 양청우 스님을 비롯한 열 명의 스님과 법당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실 때였지요. 그 무렵에도 스님은 대학자로 알려졌지요. 인상은 아주 좋으셨어요. 그리고 그 무렵 스님은 강원도 종무원장이셨어요. 그리고 종회의원이어서 종회가 열릴 때에는 서울에 오시고 그랬는데 그럴 때에 내가 뵈었지요.

-1964년 1월, 월정사에 대처승들이 쳐들어와서 비구승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격돌한 이른바 월정사 정화 때에도 뵈었지요?
그랬지요. 그때 대처승들이 월정사로 수십 명이 쳐들어오고 집달리가 와서 집행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월정사에 있었던 월탄 스님이 동국대로 와서 스님들이 월정사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을 하고 그랬어요. 그때 동국대에서는 중견 승려 강습회가 열려서 청담 스님도 거기에 계셨고, 문성각(성준)하고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월정사를 갔더니만 밤 아홉 시 정도였고, 눈이 많이 왔었어요. 그때 희찬 스님을 보니 대처승들과 싸워서 옷고름도 떨어지고 헝겊 끈을 둘둘 말아서 허리를 묶었더군요. 월정사 건물에는 차압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어요. 거의 집행당하고 방 한 곳만 남아 있었지요. 내가 희찬 스님에게 집달리가 붙인 차압 딱지를 떼어버리자고 하니까 스님은 벌벌 떨면서 겁이 나서 그렇게 하지 마라고 그래요. 그런데 좁은 방에 있으니 무척 갑갑했어요. 내가 희찬 스님의 상좌인가 말사에서 온 젊은 스님에게 귓속말로 문을 열어버리고 당신은 가버리라고 그랬지요. 희찬 스님이 책임을 지면 안 되니까 그런 방법을 쓴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갔어요. 내가 진두지휘를 해서 집행문과 차압 딱지는 그대로 두고, 큰방에서 지내고 공부를 하고 그랬어요. 서울에서 내려간 백여 명과 거기에 있던 대중 50명이 모두 방에서 강의를 듣고 그랬어요.

-그때에 탄허 스님이 강의하였지요?
탄허 스님은 대중들에게 영가집과 유불선의 비교, 선교의 차이 등을 강의하셨어요. 그리고 청담 스님도 능엄경을 강의하였어요. 일타 스님은 잠깐 계율을 이야기하였지요. 탄허 스님은 큰 칠판에 모든 것을 외워서 가득 쓰고서는 그를 강의해 나갔지요. 청담 스님도 탄허 스님 강의를 들으시고 그랬지요. 탄허 스님은 청담 스님의 강의를 듣고서는 능엄경 강의를 높이 평가하셨어요. 탄허 스님은 청담 스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막상 청담 스님이 그림을 그려가면서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보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는 강의를 처음 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청담 스님도 탄허 스님을 높이 평가했어요. 탄허 스님의 이름이야 많이 들었지만 본격적인 강의는 처음 들은 셈이었지요. 탄허 스님의 실력에 놀라시면서 종보적(宗寶的) 존재라고 하셨어요. 탄허 스님이 주로 강의를 하셨는데, 대중들을 붙들어 놓으려고 하니 신이 나게 하셨어요. 스님은 유불선을 종횡으로 말씀하시면서 공자, 맹자의 이야기를 섞어 가면서 큰 칠판에 가득 쓰여 있는 한문을 설명하셨지요. 나는 그 전에 청담 스님에게 신심명·금강경·능엄경 강의를 들었어요. 그러나 사변의 일과 정화운동에 나서는 바람에 강의를 집중적으로 듣지 못하였는데, 월정사 거기에서 본격적으로 강의를 들은 셈이지요. 그때 우리는 거의 보름 정도를 있었어요. 거기에서 강습한 스님들에게 수료증을 주고 그랬지요. 그리고 원주지원에다가 항고를 하면서 동시에 집행정지 가처분을 걸어 놓았어요. 가처분과 함께 효력정지 가처분도 걸어 놓았지요. 그래서 원주지원에서 우리가 이겼어요. 월정사 일을 다 해결해 놓고 나왔어요. 월정사 스님들이 살도록 하고 나왔지요.

-지금 말씀은 귀한 증언입니다. 그 이후에는 탄허 스님을 어디에서 만나 뵈었는가요?
탄허 스님이 1966년 경인가 그 무렵에 동국대 대학선원장이었어요. 그때 나는 금산사 주지였는데, 서울에 오면 대학선원에 가서 잤어요. 동국대 대학선원이 본래는 일본 절이었고, 그곳에는 탄허 스님도 머물렀지만 동국대 재단 사무국장을 하던 오법안 스님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서울에 오면 거기서 자고, 밥도 얻어먹고 그랬지요. 그때에 탄허 스님이 대학선원에서 보조법어를 강의하셨는데, 나도 그 강의를 들었어요. 그리고 스님이 그때에 동국대 중강당에서 <금강경> 강의를 근 한 달간 하셨어요. 나도 그 강의를 거의 들었는데 중강당의 3분지 2가 꽉 찼고, 대통령에 입후보한 오재경, 전진한 선생 등 명사들이 많이 들었어요. 또 관응 스님이 용주사 주지할 때 거기서 포교사 강습회를 열었는데, 그때에 운허 스님, 탄허 스님, 청담 스님, 관응 스님이 강의를 하셨어요. 그때에도 내가 총반장이었지요. 거기에서도 거의 한 달간 강의를 들었어요. 탄허 스님은 해박하게 말씀을 잘 하셨어요. 공자, 맹자, 도교도 함께 이야기하시고 마의상법 관상학과 약 짓는 법 등도 보조적으로 하시고 그랬어요. 스님은 단순히 경전 해석만 하신 것이 아니었어요. 그때에 보니 운허 스님은 경전 실력이 대단해요. 그리고 전통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지 다양한 경전에 대해서 많이 아시고, 조용하게 강의를 하셨어요, 탄허 스님은 유불선을 다 알고, 공부를 많이 해서 강의가 웅변적이지요. 탄허 스님은 설통(說通)이에요. 관응 스님도 유불선을 알고, 종교도 알아서 비교는 하지만 이 스님은 강사 성격보다는 포교사 기질이 있어요. 아는 것을 재미있게 가르쳐서, 포교사가 써 먹게 가르쳐 주었어요.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 많이 배우셨군요?
그렇지요. 나에게 크게 영향력을 끼친 스님은 세 분이에요. 첫째는 우리 스님 금오 스님을 16년간 모시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고, 다음으로는 청담 스님이지요. 청담 스님은 정화운동의 화신이고, 인욕보살이고, 종단정화에 큰 활동을 하셨지요. 그 다음이 탄허 스님이에요. 그리고 속인으로는 이종익 선생에게서 강의를 많이 들었고, 다음으로는 이기영 박사지요. 이기영 박사가 정화기념관에서 강의를 하면 늘 들었어요. 이기영 박사는 원효 강의를 할 때에 원효 기신론소의 요익중생(饒益衆生)에 대한 것을 많이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 말에서 큰 자극을 받았지요. 내가 그후에 금산사 주지를 할 때 화엄불교대학을 운영하였는데, 그러면 그 분을 초청해서 특강으로 꼭 모셨어요.

-금오 스님의 비문을 탄허 스님이 쓰셨거든요. 여기에 대한 내용을 들려주세요.
우리 스님이 1968년에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 후에 비석을 세웠어요. 그 작업의 총책임자는 월산 스님이었고, 실무는 탄성 스님이 했어요. 우리 스님의 비석 만드는 것은 신도들의 시주를 받지 않고, 문도들이 있는 삼사(三寺)에서 돈을 내서 했지요. 탄성 스님이 날보고 탄허 스님과 친하다고 그러니, 부탁을 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대원암에 계신 탄허 스님을 찾아가서 부탁했지요. 내가 스님에게 사람들이 알아듣게 국한문으로 해달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스님은 그런 것은 저기 운허 스님에게 가서 부탁하라고 그러셨어요. 당신은 한문으로 된 것만 하신다면서. 그래서 내가 그러면 그냥 한문으로 해 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래서 우리 스님의 비석과 부도를 세웠는데, 늦게 세웠지요. 그리고 그 후에 대원암에 가서 스님에게 휘호를 하나 써 달라고 부탁을 하였더니, 판치생모(板齒生毛)를 써주셨어요. 그것은 전강스님의 화두였는데, 그 유묵은 금산사에 액자로 해서 걸어 두었어요.

-탄허 스님은 1983년에 입적하셨는데, 월정사에서 열린 영결식장에는 가셨나요?
나는 참석 못했어요. 나는 1980년에 총무원장을 하다가, 10·27 법난을 겪고 나서 총무원장을 그만두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가 있었어요. 미국에 간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스님의 부음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그때 LA의 반야사 법회석상에서 내가 탄허 스님에 대한 추모담을 말하였고, 또 한 번은 절 밖의 식당에서 신도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탄허 스님은 수행을 많이 하신 훌륭한 스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추모 묵념을 올리고, 반야심경 한편으로 명복을 빌기도 했어요. 그런데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그 부고를 한 광고에 내가 장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올라갔다고 해요. 내가 평소에 스님을 존경했다고 해서, 내가 국내에 없지만 누가 넣자고 발의를 해서 넣었다고 그래요. 나는 희찬 스님이 그랬나 그러지요.

-탄허 스님은 스님들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교재를 다 번역하였고, 월정사와 영은사에서 수도원을 열었지요?
그랬지요. 탄허 스님은 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경전을 직역으로 다 번역했지요. 그 분은 의역을 하지 않았어요. 의역을 하면 불조(佛祖)의 뜻에 어긋나게 되고, 그러면 큰 죄를 진다고 하셨어요. 월정사에 세운 수도원에서 운학 스님이 배웠고, 그리고 소요 스님도 거기에 있었고, 송광사 출신인 한정섭도 거기에서 공부했다고 그래요. 한정섭의 그 시절 이름이 초연(超然)이라고 했지요. 영은사에서는 녹원 스님, 배도원 스님이 있었지요. 비구니인 자민·자호 스님도 거기에서 배웠어요. 스님이 수도원을 낸 것은 나도 소문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탄허 스님이 수도원을 열어서 후학을 가르치려 한, 교육도량을 하시려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지만, 중간에 그만두어서 효과는 없었어요. 다만 그 정신을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하지요. 그 후에도 월정사에서 화엄산림을 겨울에 하고 그랬지요. 하여간 스님께서 교육에 관심이 지대했던 것은 사실이에요.

-월주 스님은 탄허 스님을 어떻게 보시나요?
스님은 선교를 겸하신 분이에요. 대강사이시면서도 선을 하신 분이에요. 일타 스님이 그랬지요, 스님은 강의를 안 하는 쉬는 시간에도 딱! 참선을 하였다고 그래요. 스님은 경공부를 철저하게 하셨어요. 스님은 본래 한문을 잘 하시고 유교공부를 하시다가 절로 오셨지요. 속가에서 유교를 공부하시다가 한암 스님에게 편지를 내서, 한암 스님의 해박한 지식에 감동을 해서 절로 갔다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스님은 공부를 하시다가 틈만 나면, 앉아 있어도 선에 들었다고 그래요. 어떤 때에는 기둥을 딱 부여잡고 그랬대요. 이것도 화두를 들고 당신 나름으로 선에 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스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스님을 유학자로만 알아요. 유교적인 것이 많다고 비하하였어요. 이런 사람들은 스님의 강의를 안 들어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스님은 아는 것이 월등하지요, 유교, 불교, 도교, 선리(禪理)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어요. 강의 도중에 불교 내전 말고도 공자, 맹자를 많이 말씀하시고 유불선의 비교를 많이 했어요. 강의를 하시다가 주역도 말하고, 조선 중엽의 지사(地師)인 남사고(南師古)도 말하고, 정역(正易)을 말한 김일부도 말하고, 토정 이지함도 말하고 그래서 오해를 받았지요. 그러나 다른 스님들은 경과 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만 맴돌았지요. 한마디로 말해 탄허 스님은 선교를 겸한 분이에요. 유불선에 대해서 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강의 도중에 여러 말씀을 하셨어도 마지막에 가서는 선(禪)으로 귀결되었어요. 스님은 강의를 할 때에 비교, 대비, 비대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을 인용 못해요. 왜냐하면 경전과 선지만 알고, 아는 것도 단편적이니까 못하는 것이지요. 스님의 강의는 구수하고, 자신있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하셨어요. 스님이 큰 칠판에 한문을 가득하게 외워서 써 놓고 강의를 하면 사람들이 압도를 당하지요. 하여간 스님은 강의하시는 것이 선변(善辯)이고, 조리 있게 하고, 모든 것을 선(禪)에다가 귀결시켰어요.

-탄허 스님의 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일제시대에는 개운사의 대원강원을 열었던 박한영 스님이 장안의 최고의 지식인이었어요. 그래서 석학이라고 불리던 최남선, 신석초, 이광수 같은 사람들이 다 박한영을 찾아와서 배웠대요. 그래서 박한영의 해박한 지식에 압도를 당했다고 그래요. 천재라는 최남선이 찾아와서 원효의 기신론을 물었더니, 스님이 어느 책의 어떤 대목을 찾으면 나올 것이라고 말하여서 실제로 집에 가서 찾아보니 그 대목이 그대로 나왔다고 하지요. 박한영은 동양학의 천재라고 불리운 것이지요. 장안의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지요. 그후로는 이청담 스님이 장안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어요. 청담 스님도 선교를 겸하시고, 경전도 알고, 현대적 감각도 있고, 그리고 일본에서 2~3년을 있어서 일본책도 넉넉히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박한영 스님이 가신 후에는 청담 스님이 그런 역할을 하였지요. 성철·관응 스님도 대단하였지만 이 스님들은 산속에서만 있고, 서울에 나오시지 않았어요. 그러니 서울에 계신 청담 스님이 장안 지식인들을 상대해 주었지요. 지식인들이 불교에 대해서 물을 때에는 청담 스님을 찾아왔어요. 그러다가 청담 스님이 돌아가시고, 탄허 스님이 서울에 머물게 되니까 장안의 지식인들이 전부 탄허 스님을 찾은 것이지요. 탄허 스님은 유불선과 주역, 미래 등에 대해서 달통하잖아요. 그리고 서양의 운이 앞으로는 동양의 운이 될 것이고, 한중일 삼국 중에서 한국이 일등국이 된다고 말하고, 학자들은 종지를 갖도록 하였어요. 그래서 내가 보기에, 내가 알기로는 박한영, 이청담 후에는 탄허 스님이 그런 역할을 하신 거지요. 그래서 조선일보의 선우휘나 동아일보의 김중배가 스님을 찾아왔어요. 선우휘 선생과 대담한 것이 조선일보에 몇 차례나 크게 나오고 그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