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벗어나는 수행내용 시대별로 달라
44.수행도 - 총론
불교는 번뇌로 괴로워하는 중생들의 의지처로서의 종교이기도 하면서 매우 심오한 철학체계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부처님이 45년간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깨우치고자 한 뜻은 단지 불교의 철학적이고 교학적인 사상을 가르치려는데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그랬듯이 중생들도 개개인이 스스로 마음의 움직임을 통찰하고 행동을 다스려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팔만사천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르침들은 모두 이를 위해 설해진 것이다.
바로 이점이 원시불교와 아비달마 불교, 그리고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수행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시대별로 수행도의 내용이 완전히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원시불교나 아비달마 불교에서 수행도는 자신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던 반면에 대승불교에서는 자신보다는 타인의 구제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처음 역사적인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시불교시대와 원시불교의 경전들에 해석과 주석을 더해 감으로써 대단히 교학적이고 학문적인 철학체계를 확립한 아비달마 불교시대에서 수행도는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으로 대표된다. 삼십칠보리분법은 사념처(四念處)ㆍ사정근(四正勤)ㆍ사신족(四神足)ㆍ오근(五根)ㆍ오력(五力)ㆍ칠각지(七覺支)ㆍ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이 숫자를 전부 합하면 37가지가 된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회부터 하나하나 설명하겠지만 팔정도는 앞 회에서 이미 설명했으므로 제외하기로다.
또한 사념처는 팔정도 중의 정념(正念)이고 사정근 역시 팔정도 중의 정정진(正精進)에 해당함으로 이에 대한 설명 역시 생략하기로 한다.
원시불교경전에서는 본래 삼십칠보리분법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형태의 다양한 수행도가 설해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의 설법방식이 상대방의 이해도나 성격, 그리고 처한 상황에 따라 방법을 달리해서 설명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이었기 때문이다. 삼십칠보리분법도 이와 같이 여기저기 설해져 있던 것을 아비달마불교시대에 정리해서 체계화 한 것이다. 그런데 아비달마 시대에 이르자 부처님이 성도 이후에 열반에 드시기 전까지 평생을 중생을 위해 교화하고 설법했던 실천수행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 가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출가자 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불교를 학문적으로 접근했고 수행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완성에 집중하게 되었다. 아비달마 불교의 이러한 성격은 불교의 본래 의미로 되돌아가 부처님의 참뜻을 실천하자는 대승불교가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대승불교시대에서는 자신의 깨달음 보다는 다른 사람의 구제에 무게중심을 두었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곧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도라고 하는 대승보살사상이 생겨나게 됐다. 그 수행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여기에 네 가지를 더해 십바라밀(十六波羅蜜)로 설명되기도 한다. 육바라밀의 바라밀은 범어 ‘빠라미따(p쮄ramit쮄)’의 소리 그대로를 번역한 말로 번뇌에 가득 찬 중생세계인 이곳[此岸]에서 깨달은 열반의 세계인 저곳[彼岸]으로 건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하자면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의 여섯 가지 실천수행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모두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이 중에 지혜는 팔정도의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에 해당하고 지계는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에 해당하며 정진은 정정진(正精進)에 선정은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육바라밀은 팔정도에 보시와 인욕이라고 하는 대승적 실천행이 추가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