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설화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고영섭 교수의 인문학 유행(遊行) 23

2012-03-05     고영섭(동국대 불교학과)

1. 신화이야기

흔히 신들의 이야기를 신화라 하고, 인간의 이야기를 설화라고 한다. 그런데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과 그 이전에 이미 선재한다는 주장이 공존한다. 과연 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인가 아니면 ‘선재하는 존재’일까. 선행하는 전제나 선입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본다면 신에도 자연신이 있고 인공신이 있다. 자연에는 모두 신성이 내재해 있다는 데서 자연의 신이 존재한다. 반면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로서 인공의 신이 존재한다. 신에는 사람이 죽어 혼비(魂飛) 백산(魄散)한 뒤에 음덕을 준다는 조상신을 비롯해서 천신과 지신 및 동물신도 있고 식물신 등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많은 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 신에는 용신, 지신, 산신, 바다신 등 뿐만 아니라 생명체와 연루된 귀신들도 있다.
『삼국유사』에 실린 건국시조들은 모두 신이한 탄생을 전제로 한다. 신이한 탄생은 인간과 변별되는 가장 큰 기제가 된다. 중국 고대의 제왕인 복희(伏羲)는 무지개와 신모(神母) 사이에서 태어났고, 역시 중국 고대 제왕인 염제(炎帝)는 용과 여등(女等) 사이에서 태어났다. 또 중국 고대 황제인 소호제(小昊帝)는 스스로 백제(白帝)의 아들이라는 신동과 황아(皇娥) 사이에서 태어났고, 상나라의 시조인 설(契)은 알과 간적(簡狄) 사이에서 태어났다. 주나라의 시조인 기(弃, 后稷)는 거인의 발자취와 강원(姜嫄) 사이에서 태어났고, 한고조 유방(沛公, 劉邦)은 용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 건국시조들은 모두 남성인 엑스(X)로 표현할 수 있는 ‘무지개’와 ‘용’, ‘백제자(白帝子)’와 ‘알’, ‘거인의 발자취’와 인연을 맺어 탄생했다. 여기서 ‘엑스’는 신들의 메타포이자 심볼일 것이다. 반면 여성인 어머니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일연은 “옛날의 성인(孔子)이 예악(禮樂)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써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이함[怪]과 용력함[力]과 패란함[悖]과 신이함[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는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상서를 주어 수명을 징험하는 부명(符命)과 천신이 주는 부신인 도록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남보다 다른 점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능히 변화를 타서 제왕의 지위를 얻고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불교의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일연은 신화를 신화로서 이해할 줄 하는 합리적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신화를 신화로서 이해하는’ 이러한 태도는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주요한 전제가 된다. 때문에 이 책에는 무수한 신들이 등장하고 그것이 이 책의 이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하늘님의 서자인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 왕검을 낳고(고조선), 귀신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도화녀 비형랑),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원군이 미추왕릉에서 나타나 적군을 쳐부수고(미추왕과 죽엽군), 문무대왕이 승하하여 동해의 용이 되고(만파식적), 삼십 삼천의 한 아들이었던 김유신이 인간으로 내려와 대신이 되고(만파식적), 옥대의 왼편 둘째 눈금을 떼어 시냇물에 넣자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는(만파식적) 등 신이한 일들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즐비하다. 이 이야기들은 신 혹은 귀신의 삶과 무대가 인간의 삶 속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이것을 ‘미신’(迷信)이니 ‘맹신’(盲信)이니 ‘광신’(狂信)과 같은 언어로 매도할 수 없다. 그 안에도 나름대로의 정신(正信)이 없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설화이야기

일연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사가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사실(팩트)을 압축하고 절략하여 빼어난 이야기꾼으로서 재미있게 재구성해 냈다. 이 때문에 ‘팩트’(사실)에 대한 가감을 허용하지 않는 실증주의사학에서 볼 때 『삼국유사』를 사서로 수용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가 시간이자 의식의 흐름의 기록이라면 그 시간에 참여하는 인간의 시간과 흐름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동일한 사실이라도 보는 사람의 각도와 시선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관점을 내올 수 있다. 그 팩트가 나의 주관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술하는 나의 의식 속에서 이미 취사선택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일연의 『삼국유사』가 편집적 성격이 강한 저술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사료를 취사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의 편제에 따라 기술하는 과정에서 주관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관의 투영이 『삼국유사』가 단순한 편집적 저술을 넘어서고 있다는 평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해서 『삼국유사』에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재적인 사실 중심으로 기록한 『삼국사기』에는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문학적 상징과 비유로 수놓아져 있다. 때문에 『삼국유사』에는 왕실 안팎의 즐비한 정치적 사건들을 자신의 사관에 맞춰 없애버린 많은 ‘진실들’을 고도의 비유와 상징으로 담아내고 있다. 즉 승자의 편에서 기술한 『삼국사기』가 제거해 버린 것과 달리 『삼국유사』는 승자의 편뿐만 아니라 패자의 편에서까지 기술해 냄으로써 우리 역사를 보다 풍성하게 복원하고 있다. 그리하여 편향된 시각에 서서 주요 부분들을 일방적으로 생략해 버린 『삼국사기』와 달리 균형적 감각 위에서 이루어진 『삼국유사』는 인간 삶의 극단을 치우침 없이 놀랍게 복원해 놓고 있다.
이를테면 일연은 ‘도화녀 비형랑’ 조목을 통해 신라문명의 르네상스를 구축한 진흥왕 이후 신라 왕실의 정치 지형도를 패자와 승자 사이의 균형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진지왕과 도화녀 사이, 즉 사람과 귀신의 결합[人鬼交媾]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비형(鼻荊)의 남다른 출생과 신이한 능력을 암시해 줄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사람과 귀신의 결합으로 임신된 것을 ‘귀태’(鬼胎)라고 한다. 귀태설화는 중국의 『태평광기』의 ‘염수’(苒遂)설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설화는 도화녀 설화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귀신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신 혹은 귀신의 이야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신’ 또는 ‘인간이 만들어낸 귀신’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또 하나의 사료가 될 수 있다.
‘도화녀 비형랑’ 설화의 이면에는 역사적 진실이 투영되어 있다. 비형이 진지왕의 사후에 태어났다면 그는 진지왕의 유복자(遺腹子)일 수밖에 없다. 일반 사서들에 근거하면 진지왕의 아들로는 용춘(龍春)이 있다. 반면 근래 발견된 필사본 『화랑세기』에 근거하면 진지왕에게는 용수와 용춘 두 아들이 등장한다. 이 둘의 관계를 형제로 보는가 하면 용수는 단순히 용춘와 음이 서로 비슷할 뿐[音相似]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설화는 용수와 용춘이 형제간이든 아니면 용춘의 다른 이름이 용수이든 간에 사륜계의 후손이었던 용춘이 왕위 다툼에서 동륜계(진평-선덕-진덕여왕)에 밀려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후대의 사실이기는 하지만 사륜의 손자인 춘추가 무열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과정에서 이 설화는 역사적 진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3. 사가의 관점

설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륜(舍輪)계와 동륜(銅輪)계의 갈등과 공생 관계를 읽어낼 수 있다. 이 설화의 주인공인 비형은 용춘을 상징하고 있다. 용춘은 진평왕 51년(629)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공격 때 대장군으로 출전하였고, 황룡사 구층탑을 총지휘 감독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 대신 진평왕의 딸인 천명(天明)공주의 남편이 된다. 이 무렵 진지왕은 화랑제도 전반에 대한 유신(維新)을 감했하였다. 왕은 화랑과 미륵신앙을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거칠부와 김무력의 죽음을 맞았고 동륜계의 위협 속에서 백제의 공격까지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기록대로 그의 ‘정사는 어지러워졌고[政亂] 주색에 빠져있었으므로’[荒淫/媱] 불명예스럽게 폐위되었다.
기록은 진지왕이 사량부의 서녀인 도화녀에게 통정(通情)을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로 보면 이것은 신분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어서 성사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설화의 주인공인 비형이 용춘이라는 전제 아래 본다면 도화녀는 사량부의 서녀일 수 없게 된다. 동시에 도화녀는 사량부 기오공(起烏公)의 여식이자 진지왕의 비인 지도부인으로 짐작된다. 또 사량부는 중대 무열왕실의 왕비족이었다. 김유신의 금관가야계도 사량부에 편입되었고 효소왕대의 화랑 부례랑의 어머니 역시 사량부 경정(鏡井)궁주로 봉해졌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이 설화는 진지왕 폐위 이후 그의 장인인 사량부 기오공의 몰락에 기초한 기록으로 이해된다. 왕이 폐위되면 폐위된 왕비족 역시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더욱이 ‘정란황음’이란 표현에 담긴 ‘무능력’과 ‘부도덕성’으로 공격한 뒤라면 더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록처럼 비형이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나라의 큰 공사(다리-문루)를 지휘했다는 것은 그가 전쟁에 무장으로 나아간 것을 암시한다. 또 그를 ‘랑’(郞)으로 불렀다는 것과 진평의 명에 의해 비형이 휘하의 유능한 인물로서 길달(吉達)을 천거한 일 등으로 보아 그와 그들을 화랑과 낭도 관계로 볼 수 있다. 14·15~17·18세 미소년으로 구성된 화랑도는 무리를 지어 도의를 연마하고 산수를 유람하였으며 인품의 호오(好惡)를 살펴 인물을 조정에 추천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경주의 불우(佛宇)인 ‘영묘사’ 조에 의하면 신라의 불교 사찰들이 다 무너졌지만 영묘사만큼은 완연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세간에 전하기를 이 절터는 본디 못이었는데 두두리(도깨비)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그 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 황룡사 구층탑에 버금가는 영묘사의 창건이 선덕여왕 대의 양지(良志)법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형이라는 신이한 인물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진평왕-선덕여왕의 동륜계는 석존의 종족임을 내세우는 진종설(眞種說)을 원용하여 권위를 확립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라의 불국토설을 제창하였다. 결국 왕권이 동륜계로 넘어가자 당시의 안홍과 자장 등과 같은 고승 대덕 역시 왕과 왕실의 편에 섰다. 반면 사륜계인 비형은 비록 왕권 계승에서는 밀려났지만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언중(言衆)은 적지 않았다. 때문에 자신들의 나라 신라가 흥하려면 신이한 능력을 지닌 자여야 한다는 무언의 암시가 있었다. 이들은 용춘(비형)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사유와 가치를 존중하는 부류였고, 이 설화는 ‘신라 도깨비 시조에 대한 본풀이(시조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일연은 양지법사가 선정(禪定) 속에서 영묘사를 이루어냈다고 풀이했지만, 또 다른 전승에서는 두두리(도깨비)의 솜씨라고 적고 있다. ‘도화녀 비형랑’ 조목은 신라문명의 반석이 불교라는 신사조(新思潮)에 의해서만 아니라 전통적 사유와 가치를 존중하는 또 다른 흐름에도 의지했음을 상징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