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다시 오면 한바탕 놀자” 일연 스님 목소리 들리는 듯
삼국유사의 도량 인각사- 부도밭 기행 66
5년 머물며 ‘삼국유사’ 완성 후 입적
왕희지체로 새긴 탑비 훼손 근래 복원
교학에 밝으면서 생사 자재하던 선승
여러 이적 보였지만 비문에 일부 소개
어떤 스님이 국존(國尊, 일연 스님)의 앞에 나아가 묻기를,
“석존께서는 학림(鶴林, 쿠시나가라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셨고, 화상은 인령(麟嶺, 군위 인각사)에서 입적하시니 그 상거(相去,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나이다.”
스님께서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상거가 얼마냐?”
다시 말씀 드리기를,
“그렇다면 지금과 예가 마땅히 변천함이 없어 분명하게 목전에 있나이다.”
스님께서 또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 이르되,
“분명히 목전에 있다.”
다시 말씀 드리기를,
“뿔을 세 개 가진 기린이 바다에 들어가고 공중에 걸린 조각달이 물속에서 나옵니다.”
스님께서 이르되,
“훗날 다시 돌아오면 여러분과 더불어 한바탕 놀자.”
또 어떤 스님이 묻기를,
“화상께서 100년 후에 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일상생활, 이것뿐이다.”
“군왕과 더불어 하나의 무봉탑(無縫塔, 인간의 경지를 뛰어 넘은 솜씨로 만든 탑)을 조성하더라도 무방하겠습니다.”
“어느 곳으로 왔다 갔다 하느냐?”
“법을 묻고자 함이옵니다.”
“이 일은 모두 아는 일이니 더 이상 묻지 말라.”
또 어떤 스님이 묻기를,
“스님은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이 마치 세상에 없는 것과 같으며, 몸을 보되 또한 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더 오래도록 세상에 살아 계시면서 대법륜을 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거나, 저 세상에 있거나, 가는 곳마다 불사(佛事)를 하고 있느니라.”
불후의 명저(名著)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이 군위 인각사에서 입적을 앞두고 제자들과 나눈 문답입니다. 이렇게 제자들과 다정하면서도 기상이 넘치는 법거량을 하면서 한 생애를 마감하는 일연 스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람에 걸리지 않는 도인의 풍모가 어떤 것인지, 머릿속이 시원해 질 것입니다.
일연 스님은 법거량을 마치고 대중을 향해 “날마다 공부하는 경지를 보고하라. 가려운 통양지(痛痒之-有念 즉 인식의 세계)와 가렵지 않은 불통양지(不痛痒之-無念 즉 인식을 초월함)가 모호하여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고는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 “이것이 곧 통양지라”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내리치고 “이것은 불통양지라” 했고, 다시 세 번째 주장자를 내리치고는 “이것은 통지냐? 불통지냐? 시험 삼아 자세히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법상을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가서 조용히 손으로 금강인을 맺고 입적하셨습니다.
수행과 강학 그리고 저술에 몰두한 일연 스님은 여러 사찰에서 수행했고 말년에 인각사에서 5년간 머물다 입적 했습니다. 한국인문학의 기틀이 된 <삼국유사>는 인홍사에서 시작해 운문사에서 본격적으로 집필하고 인각사에서 마무리 한 역작입니다. 이 기행에서 <삼국유사>의 가치를 구구절절 드러내는 것은 지나치게 새삼스러울 것입니다.
일연 스님의 부도가 서 있는 인각사 마당에 서면 스산한 느낌이 듭니다. 이미 겨울이 깊었고 극락전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데다가 마당에 깔린 자갈 밟는 소리가 귀를 거스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몇 번의 이사를 거듭하여 지금의 자리에 서 있는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尊靜照之塔, 보물 제428호)’은 자연석을 딛고 서 있습니다. 팔각의 하대석과 다소 원형으로 옮겨가는 중대석 그리고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대석의 가녀린 음각의 연꽃문양이 단출하기 그지없습니다. 일연 스님의 명성에 비해 의외로 장엄하지 않은 부도 앞에서 탑의 조성 시기가 국난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때였음을 절감합니다.
비각 안의 탑비는 거의 파괴되어 글씨는 알아볼 수 없고 몸돌 조각만 일부 서 있습니다. 탑비가 파괴 된 것은 몸돌의 서체가 왕희지체를 집자해 새긴 것이어서 글씨에 관심 있는 권력자들이 너도나도 탁본을 뜨고 관리를 하지 않은데다가 임진왜란의 병화까지 입은 탓입니다.
“다시 돌아 와 한 바탕 놀자” 약속하고 입적한 스승의 유체와 유적이 세월의 풍상에 그렇게 시달리는 동안 인각사 역시 쇄락의 길을 걷다가 근래에 불사를 시작했으니 시절인연이 맵고 차가움을 느낄 뿐입니다. 다행히 탑비의 탁본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전해지고 그것을 총괄하여 비문을 복원하고자 애쓴 학자들이 있어 거의 완역에 가까운 비문을 새긴 비석을 2006년 일연 스님 탄생 800주년을 맞아 새로 세웠으니 그나마 위안입니다.
일연 스님의 탑비는 고려 충렬왕 당시의 문장가 민지(閔漬, 1248~1326)가 지었습니다.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하여 새긴 사람은 일연 스님의 제자 죽허(竹虛) 스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에 의하면, 충렬왕은 재위 9년이 되는 해에 군신들에게 “나의 선왕들은 모두 석문(釋門 불교 승단) 중에 덕이 높은 스님을 왕사로 모시고, 또 더 큰 스님은 국사로 추대하였거늘, 부덕한 과인만이 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지금 운문화상(운문사 주지인 일연 스님)은 도가 높고 덕이 커서 모든 국민이 숭앙하거늘 어찌 과인이 스님의 자택(慈澤)을 크게 입었음이랴! 마땅히 모든 국민과 함께 존숭하리라” 하고 스님을 나라의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일연 스님은 처음에는 사양 했으나 임금의 뜻이 간절하여 허락 했는데 칭호를 국존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국존’이라 칭한 배경은 ‘국사를 고쳐 국존이라 한 것은 대조(大朝 원나라를 가리킴)의 제도인 국사란 칭호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비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토를 짓밟히고 국가적 스승의 호칭도 바꿔야 하는 시대의 아픔이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민지는 비문의 말미에 일연 스님과 관련한 몇 가지 이적(異跡)들을 열거하고 더 많은 이적이 있지만 사람들이 미신으로 여길까봐 적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안 보여 준다면 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일화 몇 토막이 비석 뒷면의 음기(陰記)에 들어있습니다. 산립(山立) 이라는 스님이 지은 이 음기역시 여러 탁본들을 종합해 전체 해독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눈길 끄는 이야기 하나를 읽습니다.
“국존의 행장을 살펴보니 그가 임종할 때 대중을 모아놓고 유언을 남겼다. 기(氣)도 다 끊어지고 많은 시간이 흘러간 후 선원(禪源) 정(頂) 스님이 어찌할 바를 몰라 실성하여 울부짖으면서 ‘황망 중에 탑을 세울 장소를 여쭤 볼 겨를이 없이 입적하셨으니 후회막급’이라며 대중들과 함께 탄식을 했다. 이때 스님께서 적정삼매로부터 조용히 깨어나 대중을 돌아보고 이르되 ‘여기서 동남쪽으로 5리(2Km)를 가면 숲이 있는데 지형의 기상이 청룡과 백호 등이 제대로 짜이고 안은한 곳이 있는데, 마치 고총(古?)과 같다. 거기가 길상지인 명당이니 탑을 세우가 적합하다’ 하시고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 황당한 감이 없지 않으나 생사에 무애자재 했던 일연 스님의 일면목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습니다. 산립 스님은 일연 스님 제자들의 청에 의해 음기를 지었습니다. 비의 뒷면에 굳이 음기를 써서 새긴 이유는 일연 스님의 생애 가운데 비문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문도들의 면면을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탑과 탑비가 서 있는 절 마당 후미에 ‘일연스님 생애관’이 낮은 단층 건물로 지어져 인각사 출토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짧은 겨울해가 온기 풀린 빛으로 산마을의 한산한 절집을 비추고 있습니다. 인간사에서는 해마다 일연 스님의 정신을 되살리고 <삼국유사>를 비롯한 저작(著作)들의 진면목을 조명하는 행사들이 열립니다. 그때마다 일연 스님은 어느 한 관람객의 모습으로 인각사 마당에 들어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왔으니 한바탕 놀아보자!”
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