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지혜의 은빛 바다 오늘도 눈부시게 펼쳐졌네

2012-02-20     임연태 논설위원
▲ 공덕비와 부도 소나무 등이 한데 어우러진 은해사 부도밭/사진=이승현(시인 사진작가)

조선 르네상스 시기의 영파스님
화엄학과 자비행으로 덕 베풀어

‘살생 금하는 숲’ 조성해 생명존중 실천
첨단 시대에도 받들어야 할 고귀한 가르침


금포정(禁捕町).
살생을 금지하는 구역이라는 뜻입니다. 은해사 가는 숲길에 금포정이라는 표식이 있습니다. 1714년 숙종 때에 은해사가 일주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고 소나무 숲을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이 숲에서는 일체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모든 생명이 차별 없이 공존하는 화엄세계를 그렇게 상징한 것이니, 스님들의 지혜가 놀라울 뿐입니다.

5리에 이르는 상생의 소나무 숲을 거쳐 은해사에 이르는 것은 해탈문을 열고 극락세계에 닿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공존의 정신은 오늘에도 이어져 몇 년 전 두 차례에 걸쳐 1080 그루의 금강송을 식재했다니 앞으로도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가는 길은 상생의 화음이 어우러질 것입니다.

굳이 말을 해야 진리가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종이에 쓰고 바위에 새겨 전하지 않아도 진리는 전승됩니다. 숲 하나에 담긴 정성이 300년 세월을 이어지고 있다면, 앞으로 3000년을 넘는 시간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빛바래지지 않는 진리이고 그침이 있을 수 없는 중생의 염원이기 때문입니다.
상생의 숲길 옆은 개울입니다. 굽이굽이 팔공산 깊은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길이 마을로 접어들며 그 기세를 다소곳하게 접어 들이는 모습이 경건합니다. 숲길과 물길은 그렇게 생명의 질서를 존중하며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 길 은빛 세계가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절에 비치된 팜플릿은 신라의 진표율사가 은해사를 이렇게 묘사한 시 구절을 남겼다고 전합 니다. ‘은빛 세계로 이르는 한 길’은 무엇일까요? 일체중생의 복락이 흥겹게 진동하여 부처님의 땅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금포정의 정신은 이미 도량을 열었던 아득한 때로부터 이어져 온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은빛바다는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출렁거리는 해탈의 바다입니다.

해탈의 바다, 은해사 사역은 숲길과 물길을 따라 오르다가 다리를 건넌 곳에 우뚝한 당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신라 현덕왕 원년(809)에 혜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고 보면, 은해사의 사적은 팔공산 자락만큼이나 그윽하고 선찰의 향기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전의 역사를 방증할 자료들이 사라져 버렸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은해사 부도밭은 숲길과 물길의 호응을 감상하며 오르다가 다리를 건너 절로 가기 전 왼쪽 숲에 있습니다. 굵은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고 뒤편은 석벽인데 기와를 얹은 돌담이 앞쪽과 좌우를 두르고 있어 영역을 확고하게 구분시키고 있습니다. 가운데 쯤 푸른 이끼가 서린 둥근 돌 하나가 서 있는데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씨가 뚜렷합니다. 옛 스승들의 법체인 부도와 비 그리고 소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진 은해사 부도밭도 금포정 숲길의 정신이 그대로 묻어나는 상생의 법당입니다.

▲ 절반이 깨지고 없는 비석의 파편 /사진=이승현(시인 사진작가)
뒷줄에는 1m 남짓의 송덕비들이 즐비하게 섰는데 이 또한 은해사가 세속과 함께 해 온 교분의 역사일 것입니다. 더러 총탄 자국이 그대로 드러난 비도 있고 반은 깨져 나간 비도 있어 세월의 무상을 설법합니다. 팔각원당형과 석종형의 부도 4기가 중앙에 위치하고 그 오른쪽은 사적비가 서 있습니다. 왼쪽에 묵묵히 서 있는 비석 하나가 눈길을 끄는데 영파성규(影波聖奎, 1728~1812) 스님의 행적이 담겨졌습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비석입니다.

비는 두부 같은 사각형의 화강암을 받침으로 하였고 몸돌은 검습니다. 갓은 두툼하고 처마끝을 유려한 곡선으로 들어 올려 다소 강하게 다가오는 무게감을 하늘로 흩어버립니다. 별 장식이 없이 점잖게 조각된 비는 스님의 것이라기보다는 유학자의 것으로 어울릴 듯합니다. 모름지기 스님의 비는 장엄하고 화려하거나 다소 투박해도 이런저런 장식과 조각으로 메시지를 담는 것이 제격이니까요.

억불의 시대에 유가의 방식을 절집으로 불러들였다고 애석해 할 일은 아니지만, 스님의 행적을 담은 비가 지나치게 단조로운 것이 입맛을 씁쓸하게 합니다. 영파 스님의 부도는 원래 모시지 않았는지 세월이 갉아 먹었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영파 스님의 생몰연대를 살펴보니, 그 스님이 출현했던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 때였습니다. 영조의 재위기간(1724~1776)과 정조의 시대(1776~1800 재위)를 살다 간 영파 스님은 화엄의 대가였습니다. 홍문관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낸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비문은 스님의 생애를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유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스님의 생애라 할지라도 그 삶의 진솔함과 수행자로서의 거침없는 풍모가 행간에 알알이 들어차 있습니다.

“우리 동방에 불법이 성대하였던 것은 신라와 고려 때로부터이니 이름나고 거대한 사찰들이 여러 도에 즐비하였다. 그런데 본조(조선)에 이르러 유학자들이 출현하여 척불론이 비로소 성대해 지기 시작했지만, 스님들 중에 간간히 대단한 업적을 수립한 자가 있으면 사대부들도 그 공적을 말하고 드러내 칭송하였다. 서산대사 휴정과 같은 이가 바로 그 분이다.”

남공철의 비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조선의 개국으로부터 중기에 이르는 동안 불교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가운데 ‘대단한 업적을 수립한’ 큰 스승들이 있었음을 밝히고 서산대사의 행적을 소개합니다. 그 이유는 영파 스님이 서산대사의 6대 적손이기 때문입니다. 서산에서 전해 내려오는 심인을 받은 영파 스님이니 본래는 선승이었던 것입니다.

선과 교가 들이 아니라 하나임은 스님들의 행적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영파 스님은 출가 이후 해봉(海峰), 연암(燕巖), 용파(龍坡), 영허(影虛) 등 당대의 고승들을 참방하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뜻한 바 있어 정성껏 관음기도를 하고 꿈에 <화엄경>을 받아 지니는 모습을 봅니다. 꿈과 생시도 둘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여서 어느 장로에게 <화엄경> 전질을 받아 읽으며 심오한 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로부터 영파 스님이 머무는 은해사에는 배움에 목마른 수행자들이 앞 다투어 찾아들어 화엄의 은빛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스님은 품성이 온유하였고 지기가 맑고 밝았으며, 희노애락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재화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일찍이 깨끗한 땅에 머물면서 오래도록 객진을 떠나서 자애로운 항해에 보배로운 뗏목을 타고 두루 중생을 구제 하였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문에 이르면 진심으로 상심하였고 혹시라도 와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었으며 조금이라도 난색을 표시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식객의 신발이 항상 가득했다.”

비문이 전하는 스님의 성품은 안으로 닦고 밖으로 빛을 발하는 수행자의 풍모 그대로입니다. 하나의 도량이 열리고 수행자들이 대를 이어 불조의 혜명을 잇는 것은 중생계를 향한 커다란 축복입니다. 도량에서 피어오른 지혜와 자비의 향화는 반드시 중생계로 퍼져나가 미혹한 살림살이에 빛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영파 스님의 생애 역시 정신문화가 꽃피던 조선 중기의 문예부흥에 맞추어 화엄정토를 일구는데 크게 기여했음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그런 법의 향기는 비문을 찬한 사대부의 마음을 먼저 적셔 버렸던 것인지, 비명(碑銘)이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앞부분을 읽어 봅니다.

이 선백(禪伯)께서는 사문의 위대한 분이니
총령(蔥嶺)의 묵은 뿌리 화엄의 묘결이로다.
물속의 달 마음을 맑히고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안개 마음을 편케 하는구나.
장자의 나비가 나풀나풀
환상이 아니면 현실이러니
은밀히 비밀스러운 심인을 받고서
문득 법단에 올랐구나.

일주문 부근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고 ‘일체의 살생을 금하는 장소’로 선포했던 은해사의 정신은 첨단을 구가하는 오늘날에야말로 더욱 성실하게 받들고 행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그 성성한 도량에서 선교를 융합해 화엄의 묘리를 전파한 영파 스님이 거듭거듭 출현할 때 세상은 정토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한 티끌도 진리 아님이 없고 한 목숨도 부질없다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다시 금포정 숲길을 걸어 내려오는 마음은 가볍습니다. 마른 낙엽이 둥둥 떠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극락에서 들려오는 것이라 믿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