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선교와 강선루... 보는 곳마다 "예술이다. 예술!"
절집기행 12 선암사
호남 정맥에 우뚝한 탈속의 산
백두대간의 장엄한 기상이 두류, 금강, 설악, 태백, 소백, 속리산을 거치며 남쪽으로 뻗어내려 가다가 전북 장수의 장안산(1237m)에서 서북쪽으로 불끈 힘줄 하나를 밀어 냈다. 65km를 달려 나간 그 힘줄의 끝은 무주의 주화산(600m)이고 거기서 북서로 금남정맥이 남서 방향으로 호남정맥이 산경(山徑)을 열었다.
호남정맥은 주화산의 출발점에서 만덕산, 내장산, 백암산, 추월산, 무등산, 천운산, 용두산, 제암산, 방장산, 맥이산, 조계산, 희아산, 동주리봉을 거쳐 광양의 백운산에서 숨을 멈춘다. 지도에서 호남 정맥을 보면 호남지방을 팔로 감싸 안 듯 서쪽의 영산강 유역과 동쪽의 섬진강 유역을 나누고 있다.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은 산을 넘지 못하니, 산이 가는 길은 강에서 멈추고 강줄기의 흐름은 산을 에돌게 마련이다. 조계산(844m)은 호남정맥을 달리는 많은 산 가운데 하나다.
매표소를 통과하니 비포장 길이 활처럼 굽은 몸으로 드러누워 ‘더운데 쉬엄쉬엄 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측은 산비탈이고 좌측은 지난밤의 비에 물이 불은 개천이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 흙길을 걸어 옛 절집에 간다는 것이 나름 멋진 풍경이란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부도밭이네.”
오른쪽 양지에 새로 조성한 부도와 탑비들이 일렬로 서 있다. 근래 태고종의 종정을 지낸 백암 스님, 덕암 스님 등의 부도와 탑비다. 선암사에는 부도가 많다. 그만큼 고승이 많이 배출된 유서 깊은 절이란 의미다. 입구 쪽의 동부도전 외에 송광사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부도전이 있고 동부도(보물 제1185호), 북부도(보물 제1184호), 대각암부도(보물 제1117호)가 있다. 보물로 지정된 이들 부도는 정확하게 주인을 알 수 없지만 조각솜씨는 매우 정교하고 우아하여 선암사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선암사 기행의 포인트는 단연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와 강선루(降仙樓)다.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이르는 길에 아치형의 아름다운 다리가 있고 숲길에는 누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천천히 길을 걸으며 자연을 호흡하지 않으면 그 멋도 놓치고 만다.
“와, 사진에서 많이 본 다리다. 다리 아래로 저렇게 누각이 보이는 장면, 예술이다, 예술!”
승선교를 바라보며 나팔수씨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승선교와 강선루. 선암사의 트레이드마크잖아. 어느 때에 와도 여기서 보는 풍경은 일품이라는데 이렇게 녹음이 무성하고 물이 많이 흐르니까 더욱 좋은 것 같다 그치?”
조선 숙종 33년(1707)겨울에 시작하여 6년 뒤에 완공했다는 승선교는 우리나라 홍예교의 대표작이다. 물길을 가로지르는 반원형의 돌다리, 물에 잠긴 그림자로 완전한 원형을 이루게 하는 그 의미심장한 축조기술은 생각할수록 묘하다. 승선교 위를 걸어 강선루 앞에 선 나팔수씨는 누각에 한 번 올라가보고 싶었다. 올라가 옆의 계곡물을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일 것 같았다. 강선루 아래 작은 개천을 넘는 다리에는 선원교(仙源橋)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절 이름은 선암사고 다리는 신선이 승천한다는 승선교, 누각은 신선이 내려 온다는 강선루, 그 아래 다리는 선원교. 모두 신선 선(仙)자가 들어가는데 불교와 신선사상이 어우러진 이름이겠지?”
혜능의 선맥 이어진 도량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 일주문 안쪽에 옆으로 걸린 현판이 조계산과 선암사의 옛 이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 옛 이름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1828년에 용암혜언(龍岩慧彦) 스님이 쓴 ‘순천부조계산선암사제6창건기’에 이 이름이 등장한다. 내용은 신라법흥왕 때 아도화상이 꿈속에서 수기를 받고 절을 창건했는데 그 산 이름이 청량산, 절 이름이 해천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보다 100여 년 전인 1704년에 계음호연(桂陰浩然) 스님이 쓴 ‘조계산선암사사적’에서는 신라 말의 도선국사가 대비보사찰로 선암사를 건립했다고 전하고 있다. 1761년 상월 스님이 화재를 막기 위해 절 이름에 물과 관련한 글자[海川]를 넣어 불렀고 1825년에 다시 지금의 산 이름과 절 이름을 되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일주문과 범종루를 일직선으로 통과하면 정면으로는 건물이 막아서 있다. 만세루의 뒷면이다. 추녀 안쪽에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도 서체도 오랜 세월의 자취를 보여준다. 글씨는 한글소설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의 부친인 김익겸(金益兼 1614~1636)의 글씨라고 한다.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성이 함락되기 전에 김상용 등과 자폭한 충신이다. 육조고사의 한자 조(朝)는 조(祖)의 의미로 쓰였는데 육조 혜능의 선풍을 이어받은 도량이란 의미다.
대웅전 앞에 누각이 있을 경우 누각 아래로 길을 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선암사는 누각의 좌우로 돌아 대웅전에 이르게 된다. 부부는 두 개의 탑이 서 있고 석축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대웅전을 향해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동쪽과 서쪽에 엇비슷해 보이는 두 기의 3층석탑(보물 제395호)이 서 있는 대웅전 앞마당은 커다란 방 같다. 석축 위의 대웅전과 마주한 만세루, 동쪽의 심검당과 서쪽의 설선당이 사면을 막고 서 있기 때문이다.
부부는 대웅전 안에 들어가 3배를 하고 조용히 앉았다. 중앙의 불단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좌우 협시불은 없다. 상단에는 영상회상도가 모셔져 있고 왼쪽에는 비교적 폭이 큰 감로탱화와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어 불단이 장엄하게 느껴졌다.
기록에 의하면 이 대웅전은 도선국사 창건 당시에는 중층의 미륵전이었다. 그 뒤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조선 중기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이후 1660년에 대웅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다시 1823년에 불이 났다. 다음해에 해봉 눌암 익종 등의 스님들이 중창했다. 그로부터 19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선암사는 대웅전 중수를 위해 모연(募緣)을 하고 있다.
부부는 대웅전 뒤쪽의 전각들을 차례로 참배하기로 했다. 선암사 가람배치의 중심선은 여러 단으로 이루어졌다. 일주문을 들어서 범종루와 성보박물관까지가 한 단계를 이루고 만세루와 심검당, 설선당, 동서탑 등이 또 한 단을 이룬다. 그 윗단에 대웅전과 지장전, 응향각이 자리하고 있다. 뒤쪽으로 불조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팔상전이 왼쪽에 조사전이 있으며 다시 뒤로 돌아가면 원통전과 첨성각 장경각이다. 원통전 뒤에는 선암매(천연기념물 제488호)로 불리는 매화나무가 늘어 서 있다.
다시 ‘호남제일선원’이란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잔디가 고운 마당을 중심으로 정명에 응진당과 삼신당이 보이고 왼쪽으로 달마전 오른쪽으로 진영당이 자리한다. 응진당과 삼신당 사이를 따라 뒤로 돌면 산신각인데 하도 작아서 사람이 안에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다.
건물마다 스며든 역사와 예술의 향기
다시 뒤로 돌아가면 관세음보살님이 모셔진 원통전이 있는데 건물이 고무래 정(丁) 형이다. 별다른 장식은 없고 관음보살이 모셔진 불단이 정갈하게 모셔졌다. 관음보살이 주불일 경우 협시로 모셔지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은 관음상 뒤에 모셔진 관음도에 나타나있다. 원통전은 오랜만에 들린 고향집의 안방 같은 분위기다. 안쪽에 걸린 ‘대북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은 조선 순조의 글씨다.
“정조 대왕이 후사가 없어 근심하다가 선암사 눌암 대사에게 100일 기도를 부탁했고 그 기도 덕분에 순조를 얻게 되었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순조가 은혜에 보답하고자 ‘인’ ‘천’ ‘대복전’ 등의 현판을 하사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어.”
“와, 그렇다면 저 작은 현판이 순조에게는 ‘출생의 비밀’이란 말이지?”
꽃은 없지만 매화나무들이 싱싱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부는 매화철에 다시 선암사에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응진당이 정면으로 보이는 다음 구역으로 갔다. 이 구역에서 특히 감동적인 것은 달마전 뒤뜰의 석조(石槽)와 산신각이었다. 석조란 돌의 중간을 파내고 물을 담는 용기다. 달마전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건물이라 함부로 들어갈 수 없지만 부부는 조용히 중간의 부엌을 통해 뒤뜰까지 들어갔다.
“예술이다!”
고목을 반으로 잘라 만든 홈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사각의 석조에 담기고 거기서 넘친 물은 둥그런 석조에 고이고 다시 넘쳐 더 작은 석조로 넘어간다. 거기서 넘친 물은 다시 더 작은 석도로 넘어가고. 그렇게 4개의 석조가 물을 나누며 한 가족같이 뒤뜰을 지키고 있다.
선암사 화장실은 이름이 높다. 높다란 일자형 건물 중앙에 출입용으로 맛배지붕을 따로 얹어 고무래 정(丁)자 형을 이룬 외관이 독특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왼쪽의 남자용과 오른쪽의 여자용으로 구분되는데 다시 2열로 배치되어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잇게 했다.
바닥 판자가 잘 짜여 있어 무섭지 않고 칸막이벽이 그리 높지 않은데 민망하지 않다. 절집이라서 그럴 것이다. 자연발효의 과학이 깃든 선암사 ‘뒤깐’은 ‘일’을 보는 위치가 지면에서 높고 앞뒤로 창살이 있어 통기가 잘되고 악취가 덜 난다.
어찌 보면, 먹는 일 만큼이나 배설하는 일도 중요하다. 먹고 배설하는 사이에 목숨이 살아 숨 쉬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