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갑을 쏴라'는 무속의 불교 견제

2012-01-18     고영섭 동국대 교수
▲ 신라의 불교수용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 무주 죽림정사 이차돈 진영

1. 불교의 동류

진리에는 본디 방향성이 없다. 다만 우리가 그 방향을 매겼을 뿐이다. 진리[法]는 물이 흘러가듯[去]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간다. 인도에서 비롯된 붓다의 가르침은 전법승들에 의해 북서와 북동으로 흘러갔다.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셀 수 없는 전법승들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오다 목숨을 잃었다. 또 그들에 의해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 받은 셀 수 없는 구법승들이 다시 사막을 넘어가다 목숨을 잃었다. 이 사막을 넘나든 이들에 의해 붓다의 가르침은 한나라에서 위진 남북조시대에 걸쳐 고구려와 백제 및 가야와 신라로 흘러들어 왔다. 그리해 붓다의 무상과 무아와 공성의 가르침은 이르는 곳마다 뿌리를 내렸고 만나는 사람마다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까르마(業)와 다르마(法)로 이 세계를 해명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나타내는 까르마 설은 자신의 능동적인 의지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존재와 존재의 법칙을 나타내는 다르마 설은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결과임을 일깨워 주었다. 연기설의 다른 이름인 업설을 받아들인 불자들은 점차 불교의 본령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인연에 의해 생겨난 존재는 모두 변화한다’는 가르침과 ‘서로의 관계를 떠나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가르침은 ‘오온은 실체가 아니다’는 공성의 가르침으로 이해됐고 ‘서로 함께 나누는’ 자비행으로 실천됐다. 때문에 상호의존의 연기성에 의한 무상과 무아와 공성의 가르침은 상호존중의 자비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안됐다.

동아시아에 전래한 불교는 종래의 사상에 깊은 자극을 주었다. 불교는 도교·도가 및 유교사상에 영향을 주어 중국의 철학을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과 사회 윤리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불교는 소박한 자연신 신앙과 무교 신앙을 믿었던 동아시아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확장시켰다. 나아가 인간의 삶의 가치와 의미에 눈을 뜨게 했다. 불교는 동아시아인들에게 자기 행위의 주체는 자기 자신임을 역설하면서 주체적인 인격 완성을 강조했다. 불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체적 인격 완성을 통해 개인을 넘어 사회와 국가까지 성찰하는 사회적 성격을 확립하게 했다.

특히 불교의 생사관은 삶뿐만 아니라 죽음과 죽음 이후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육체는 소멸해도 정신은 소멸하지 않고 다시 태어난다는 불교의 내세관은 내세 관념이 결여됐던 동아시아인으로 해금 내세의 안심을 꾀하고 생사의 도리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 같은 내세관의 확장은 현실의 삶에 대한 긍정과 이타적 베풂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불교에서 제시한 연기설과 업설에 기초한 자유 의지는 동아시아인들이 주체적 인격을 완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불교의 윤리 사상은 개인의 윤리적 단련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 널리 전파된 대승 불교는 자연 및 초월적 세계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정치적 시사점과 같은 인간의 삶의 밀접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아시아 대승 불교의 이러한 모습은 불교의 인간관뿐만 아니라 사회관 및 자연관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불교 수양론의 핵심인 “악행을 하지 말고 선행을 하라”는 가르침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밝히는’ 능동성과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능동성과 주체성은 동아시아 사회의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2. 고구려와 백제 및 가야와 대발해의 전래

 

불교의 전래에 대한 고대의 기록은 지극히 소략하다. 때문에 문헌기록 뿐만 아니라 유물과 유적을 통해 연구를 보완해 갈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사철 분야 뿐만 아니라 종교 및 예술 등의 분야를 아우르는 통섭적 방법론이 요청된다.

아도(阿道)가 전해오고 소수림왕이 받아들인 고구려 불교는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널리 퍼졌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해오고 침류왕이 받아들인 백제 불교 역시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널리 퍼졌다. 이들 두 나라는 각 정부의 적극적 지지를 통해 불교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가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재위 2년(372)에 중국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보낸 사문 순도(順道)와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였다. 순도 이후에도 법심(法深)과 의연(義淵)과 담엄(曇嚴) 등이 전해온 불교를 수용했다. 또 2년 뒤(374) 중국 동진(東晋)에서 건너온 사문 아도(阿道)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왕은 사찰을 ‘복을 닦아 죄를 멸하는 곳[修福滅罪之處]’으로 인식했다. 왕실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순도와 아도를 각기 머물게 했다. 고구려 불교는 불보(佛寶)의 상징인 불상(佛像)과 법보(法寶)의 인증인 경문(經文)과 승보(僧寶)의 대표인 순도의 삼보 모두를 구비하면서 시작됐다.

백제의 침류왕은 원년(384)에 중국 동진東晋에서 건너온 인도승 마라난타摩羅難陀를 통해 불교를 수용했다. 왕은 교외에까지 나아가 그를 맞아들여 궁중에 머물게 하고 공경히 받들어 공양하며 그의 가르침을 품수했다. 이듬해 2월에 왕실은 새롭게 도읍한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출가[受具得度]시켰다. 또 제17대 아신왕은 “불법을 높이 받들어 믿고 복을 구하라[崇信佛法求福]”는 교지를 내렸다. 국왕이 불교의 교화를 좋아해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함께 기리며 받들어 행하자 불교가 널리 퍼져 나갔다.
가야는 인도의 부파불교와 백제를 거쳐 중국 남조에서 전해온 대승불교를 모두 받아들였다.

가야불교는 시조인 수로왕(42~199)의 부인인 허황옥 왕후가 서역 아유타국(阿踰?國)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는 바사석탑을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제8대 질지왕이 재위 2년(452)에 수로왕의 부인인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왕후가 결혼한 곳에다 왕후사를 세웠다. 그리고 삼보에 공양 올릴 비용으로 절 주변의 평전 10결을 주었다. 그래서 가야불교는 왕실에 의한 기획과 지원에 의해 이루어진 왕후사 창건을 공인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대가야의 경우는 중국 남조를 거쳐 백제에 건너온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다.

대발해(698~926) 황실 역시 8세기 중후반에 무명(無明)과 정소(貞素) 등을 인도와 중국에 파견한 뒤 그들이 가져온 <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 등을 번역할 수 있게 했다. 중국의 <책부원구(冊府元龜)>는 713년 12월 말갈 왕자가 왔을 때 상진문에서 교역과 입사(入寺) 예배를 청했다는 기록(권971)과 814년 대원유(大元瑜) 때 사신 고예진(高禮進) 등 37인을 보내어 조공하고 금과 은으로 된 불상 각 1구씩을 헌상했다는 기록(권972)을 싣고 있다. 일본문헌 <속일본기>(권34)에는 776년 사신 사도몽(四都蒙) 일행이 다음해 귀국할 때 ‘수정염주 4관(貫) 등이 부가됐다고 적혀 있다.

<일본후기>(권24)에는 ‘814년 조공사신 왕효렴(王孝廉) 일행에 기록하는 일을 맡은[錄事] 승려 석인진’(釋仁眞)의 이름도 보이고 있다. 또 <유취국사>(권193)에는 ‘795년 11월 출우국(出羽國)에 표착한 발해 사절 여정림(呂定琳)이 당에 유학하고 있던 승려 영충(永忠)의 상서를 봉정했다고 적혀 있다. 이들 기록을 통해 대발해의 불교 전래 과정을 알 수 있다.

3. 신라의 전래

신라에는 제13대 미추왕 2년(263)과 제19대 눌지왕 대(417~458) 및 제21대 비처왕대(479~499)와 제23대 법흥왕 14년(527)에 승려 아도(阿道) 혹은 사문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해왔다는 기록들이 혼재한다. 이들 기록들에는 아도와 묵호자가 거듭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아도는 ‘머리를 깎은 사람’으로, 묵(흑)호자는 ‘얼굴이 시커먼 외래 사람[黑胡子]’이라는 일반명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미추왕 대부터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라불교는 국가적 수용과 공인을 받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다. 결국 신라는 네 번째 기록처럼 법흥왕과 이차돈의 신묘한 책략[神略]인 순교사건을 계기로 삼아 불교의 교화와 전법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후 왕실과 교단이 서로 협력하면서 서로의 정통성을 확보해 갈 수 있었다.

<삼국유사> ‘기이’ 편의 ‘사금갑’ 조목은 불교 공인 이전에 불교가 어떻게 전래됐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조목에서는 소지왕(비처왕) 때 ‘신라 궁중의 첫 순교자’가 된 분수승(焚修僧)과 정월 대보름에 찰밥을 짓는 풍속의 유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분수승이란 왕실의 내전(內殿)에서 ‘향을 사루어 복을 닦는 승려’를 가리킨다. 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거둥하자 때마침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 울었다.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십시오”라고 했다.

왕은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좇게 했다. 기사가 남쪽 피촌(避村, 壤避寺村)에 이르자 멧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한참 구경을 하다가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잃어버리고 길가를 배회하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못 속에서 나와 편지를 바쳤다. 그 겉봉에는 “이 편지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가져와 바쳤더니 왕은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뜯지 않음으로써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이요, 한 사람이란 왕입니다”고 했다.

왕도 그렇게 여겨 뜯어보았더니 편지에는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보고 쏘았더니 내전의 분수승과 궁주(宮主, 妃嬪)가 몰래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정월 첫 해일[上亥], 첫 자일[上子], 첫 오일[上午] 등에는 모든 일을 조심해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16일에는 까마귀 제삿날[烏忌日]이라 해 찰밥을 제사지냈는데,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이런 것들을) 시쳇말로 ‘달도’라 하니 슬퍼하고 근심해 모든 일을 삼간다는 뜻이다. 그 못을 이름해 ‘편지가 나온 연못’[書出池]이라 했다. 여기에 나온 멧돼지[亥]와 까마귀[烏]와 쥐[鼠]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사람보다 더 영리한 혼령을 가리킨다. 무속의 세계에서 이들 동물은 샤먼을 하늘나라나 지하세계로 이끌며, 때로는 샤먼의 심부름을 맡은 보조령(補助靈)이 된다. 또 고대사회에서 일관은 조석의 날씨와 미래의 운기를 점치는 무당의 존재와 다르지 않았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에 내전에 분수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신라 전역에 불교가 이미 전래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삼국유사> ‘탑상’편 ‘전후소장사리’조에서 ‘내전분수’가 승직(僧職)으로 사용된 예를 확인할 수 있듯이 소지왕대의 내전은 궁중 내에 설치된 불당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동시에 왕이 머무르는 궁중에 내전(內佛堂)을 두고 그곳에 분수승을 머물게 했다는 것은 이미 불교에 대한 왕의 이해와 용인이 전제됐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일관은 왕권을 빌어 이 사건을 반전(反戰)으로 삼아 내전의 분수승을 불교에 귀의한 궁중 귀족여성들과의 ‘스캔들’로 몰아붙여 불교의 도덕성을 타격하고 있다.

나아가 일관이 점을 친 것처럼 거문고 갑을 쏘지 않았다면 왕이 시해(弑害)됐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일관이 왕의 미래를 점쳐 화를 면하게 해 주었다는 것은 종래의 무속세력과 신흥 불교 세력과의 마찰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이차돈이나 불교 공인 당시 법흥왕의 불교 인식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공인의 의미는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여튼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면서 우리는 소박한 자연신 신앙과 무교 신앙을 뛰어넘어 인간의 삶의 가치와 의미에 눈을 뜨게 됐고 종교적 심성을 확장시켜 주체적인 인격 완성을 도모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