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여기에 있는가
선심에세이
강보에 싸여 나비잠을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서 편안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누구나 그 시절이 있었건만 인간은 왜 누가 앗아가지 않은 그 편안함을 잃었을까. 우리가 정작 아쉽고 그리운 것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진한 향수가 아닐까 한다.
거리에 있다 보면 분주히 걷고 있는 행인을 본다. 그들에게서 편안함이나 여유란 별반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에 홀린 듯 마냥 앞으로만 달려간다. 앞은 오직 서성거림이 주관하는 세계다. 앞은 경쟁이 치성한 세계이기도 하다. 반면에 뒤는 여유가 있고, 느긋하게 관조할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앞에만 길들여져 있고 그 좋은 뒤는 낯설고 패자의 세계라고 치부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항시 채워도 다 채워지지 않은 걸인의 동냥주머니 마냥 허기를 채우기가 힘들어 진다.
경이로움은 생성과 소멸에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경이로움은 실험실에서나 일어나는 형상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주변의 일상생활에서나 혹은 자신에게서 쉼 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누구나 매일 사용하고 있는 비누를 보자. 사용하다 보면 많은 비눗방울이 일어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비눗방울의 생성과 소멸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지만 그 상황을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웃집에 아이가 탄생했다’던가 ‘열심히 노력해 신분상승을 했다’는 사실도 경이로움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나와는 별반 관계없는 일인 양 지나치고 만다.
육신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노화라는 것이다. 노화는 사념(思念)의 대상이 아니라 기적과 같은 것이다. 어제의 검은 머리가 반백으로 반백에서 백발이 되어가는 현상은 분명이 기적임에 틀림없다. 보폭을 넓혀도 민첩했던 걸음걸이가 세월의 무게에 눌려 지팡이에 의지하거나 아니면 히뜩거리고 마는 것도 경이로움이다. 이러한 현상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순응이란 이러한 현상을 받아들이는데 합당한 말이 아닐까 한다.
농부는 장마에 대비해 논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편비내를 서두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방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외부의 유혹이 엄습해도 방어할 태세를 갖추려 하지도 않는다. 임시변통으로 순간순간을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임제 선사에게는 아주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선사는 이렇게 묻곤 했다.
“임제, 자네 아직 여기에 있는가?”
그러면 제자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스승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입니까?”
“나는 언젠가 이런 대답이 나오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니, 존재계만 있을 뿐 임제는 없다네.’”
인간은 의식이 도달 할 수 있는 궁극의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어두운 길목을 배회하는 나그네이다. 임제 선사는 바로 이러한 점에 철저한 자기점검이 따랐던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철저하게 무관심해야 한다.
사무량심 가운데 사가 있다. ‘버릴 사(捨)’라는 말은 말처럼 쉽지 않다. 범어로 ‘upeksha’라고 하는데 ‘간과하다’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사념과 사념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면서 사념에 전해지던 모든 에너지가 차단돼 결국 마음의 평정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음에 대해서 무관심해진다는 말이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에머슨(Emerson)에게 물었다.
“당신은 몇 살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거의 삼백육십 살쯤 되었지요.”
남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에머슨은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믿어 왔는데,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지? 이 사람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남자는 의심에 찬 나머지 에머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척 하며 다시 말했다.
“당신이 뭐라고 했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몇 살이라고 하셨지요?”
“당신은 내 말을 알아들었잖습니까? 나는 삼백육십 살 쯤 되었습니다.”
“믿을 수 없네요. 당신은 겨우 육십 살 정도로 보이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육십 년을 살았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나의 육십 년은 남들의 삼백육십 년 보다 훨씬 더 강렬했습니다. 나는 여섯 배나 더 강한 삶을 살아온 셈입니다.”
x축이 수평이고 y축이 수직이라면 수평선상에서는 관능과 온갖 욕심과 시기 질투를 어리장수마냥 고되게 지고 가는 것이고, 수직선상은 진리에 대한 탐구와 삶에 대한 탐구로 가득한 것이다. 수직선상에서는 숫자로 나이를 세지 않고 경험으로 나이를 센다. 경험이란 신성한 체험을 말한다.
성한 체험은 미움이 전혀 없는 순수함 자체이다. 휴화산이 활화산이 되어 용암이 솟구치는 그런 현상, 그것은 경이로운 깨달음의 세계의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