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봉(五老峰)
전철을 이용하다 보면 일반석과 경로석으로 대별이 된다. 비단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해도 경로석은 빈자리가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노인 인구의 증가에 연유하기도 할 것이다. 노인만이 아니라 장애인ㆍ임신부 자리까지 허용하다 보면 자리는 더욱 모자라기 쉽다. 그 자리에 표기된 영문을 보면 Senior men 이라고 쓰여 있다. 연세 든 분들이 노인이란 말을 꺼려 한 나머지 이렇게 붙인 것으로 안다. 노인의 늙을 로(老) 자는 늙었다는 뜻만이 아니라 어른을 높이어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익숙하다’던가 ‘노련하다’는 뜻도 있으며 ‘신하의 우두머리’를 말하기도 한다. 노인이라는 말이 별반 어색하지 않은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잡마경(雜摩經)> 권상에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특징 있는 열 명이 나온다. 지혜제일 사리불 존자에서 다문제일 아난다 존자에 이른다. 유독 이 제자들에게 존자(尊者)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붙이고 있다. 범어로 존자를 sthāvira라 한다. 노인이란 말이다. 남자는 70세부터이고 여자는 50세부터 존자라고 부른다. 90세가 되면 마침내 이런 호칭은 끝난다. 그 후에는 varshīyas라 부른다. 발시야스는 세 살된 아기를 말한다. 덕이 있어 존경할 만한 사람만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단순한 경칭으로 쓰기도 하고, 연하의 사람에게도 사용하였던 것이다. 나이 먹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도 우리나라만의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말에도 선생이라고 하면 교단생활을 하지 않았다 해도 상대에 대한 경칭으로 곧 잘 부르기도 하는 말이다.
<벽암록> 제34칙에 앙산 선사가 여산에서 왔다는 한 객승에게 “그럼 오로봉(五老峰)에는 가 보았겠군”이라 묻고 있다. 이 오로봉은 양자강의 아홉 개 지류가 합하고 있는 여산의 오로봉을 말한다. 혜원(慧遠)스님이 백련사(白蓮社)를 세운 이래 불교사상의 요람이 된 산이다.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이백(李白)이 망오로봉(望五老峰)이란 시를 남길 정도로 풍광이 좋고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여산동남오로봉 廬山東南五老峰
청천삭출금부용 靑天削出金芙蓉
구강수색가람결 九江秀色可覽結
오장차지소운송 五將此地巢雲松
여산 동남쪽의 오로봉이여
푸른 하늘에 금색 연꽃이 불쑥 솟아 있구나
구강에 빼어난 경치를 모두 모아 놓았으니
내 장차 이곳에서 구름과 소나무를 벗 삼아 살으리
물론 앙산 선사는 단지 오로봉의 경치 좋은 것만을 말하지 않았다. 완전한 불성(佛性)을 갖춘 경지인 오로봉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다섯 개의 늙은 봉우리는 각하(脚下)의 참된 세계를 말하며, 선의 입장을 오로봉에 빌어 말한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등산하는 사람들을 본다.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고 한다. 걷는다는 것이 오직 건강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건강은 형이하학적인 문제의 해결이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의 문제는 제쳐둔 처사가 아닐까. 아프리카는 고대 이집트어로 고향이라고 한다.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이 걷기를 잘 하는 것은 건강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영혼의 문제를 더 중요시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주변을 해치지 않고 살고 있다. 파괴자는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살았고 여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아프리카인들은 단순히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다. 상대의 대상은 사람과 사람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소통도 따른다.
남산 걷는 길에는 인공수로가 있어 청아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 더욱 좋다. 수로에는 조약돌을 깔아 놓았다. 깎아 놓은 생밤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에 빚어 보았던 주먹 만한 송편마냥 친근감이 간다. 저 돌들은 고향을 찾아 왔구나. 태고적엔 깊은 산에 있다가 세월의 다정한 설득에 굴복당하여 계곡에 머물다가 마침내 강으로 흘러갔다. 이제 누군가의 주선으로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산은 옛산이련만 조약돌에게는 낯선 이방인이 된 듯하다. 산이 그 높은 가치를 잃지 않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산의 변함없는 속성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대단하게 여겨지던 것들도 세월의 다정한 유희와 설득 앞에서 퇴색되고 굴복당하고 만다. 서슬이 퍼렇던 경색된 이념도 탈냉전의 종식 앞에 무기력 해지고 말았다. 조상들이 소중히 여겼던 전통문화도 세계문화의 교류 앞에서 탈색되기 일쑤다.
오로봉의 참된 세계에 들기 위해 헝클어진 영혼에 빗질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