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추
불현듯 옛일이 생각났다. 좌선 할 때 수인(手印)의 문제다. 좌선시에 오른손바닥 위에 왼손바닥을 놓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 놓으면 안되느냐고 한 노스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자상한 내용은 기대할 수 없었고 그냥 오른손 위에 왼손을 놓는다고 하니 궁금증만 더할 뿐이었다.
숱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 해답은 연구를 거듭하는 동안 스스로 알게 되었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은 우선 인도와 중국문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인도인들은 오른손은 깨끗하다고 믿고 왼손은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른손은 밥을 먹는 수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왼손으로는 화장실에서 휴지 대용으로 쓴다. 오른 손가락 다섯 개로 접시에 놓인 밥을 카레와 섞어 주물러 반죽을 한다. 그러고 나서 엄지 검지 중지를 사용하여 한 입에 넣기 좋게 만들어 입에 넣는다. 그러니 정하게 다루어야 한다.
연전에 인도 교수댁에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그들의 전통 식사법이라면 어쩌나 적이 걱정했던 일이 있다. 그건 기우에 그쳤고 식탁에는 포크 나이프가 정연히 놓여 있었다.
왼손의 역할이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고 역발상을 해보면 참 현명한 일이라고 찬사를 보낼 일이다. 현대인은 문명의 이기를 한껏 누리고 있다. 그러나 환경오염에 신음하고 있다. 화장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밀림의 숲이 사라지고 있는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의 질서는 무참히 파괴되어 재앙을 낳고 있다. 이상 기후변화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중국의 한 부호는 환경파괴의 주범이 자동차라고 하여 3억원이 넘는 벤츠를 굴삭기로 부수기도 하였다.
중국의 경우 모든 것을 음양오행설에 입각하여 이해하고 있다. 무지개 하나 만을 보아도 그렇다. 무지개 홍(虹), 무지개 예(蜺) 자를 써서 표현하고 있다. 홍은 무지개의 짙은 색이고, 예는 무지개의 옅은 색을 말한다. 짙은 색은 양이고 옅은 색은 음을 표현한 것이다. 불국사나 낙산사를 참배한 신도라면 홍예문을 보았을 것이다. 왼쪽은 남성을 상징하는 양이고, 오른쪽은 여성을 상징하는 음이다. 관직을 보면 우의정 보다 좌의정이 같은 정승이라도 서열이 앞선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자연히 중국에서의 수인이 왼손은 위에 오른손은 아래에 놓는 것이 이해가 간다. 남방불교에서는 오른손을 위에 놓고 북방불교에서는 왼손을 위에 놓으니 이 또한 각 국의 문화 차이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내가 상대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개인과 개인에 국한하지 않고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에도 같은 등식이 성립된다. 이쪽 견해로 저쪽의 풍습과 가치 기준을 재려고 하면 세상은 온통 불협화음만이 있을 뿐이다.
<대정장> 47 (p.702中)에 명각선사 어록(明覺禪師語錄)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가운데 한고추(閑古錐)가 나온다.
한고추는 노고추(老古錐)라고도 한다. 끝이 닳아서 뭉툭해진 송곳으로 경험이 많은 고참납자를 이르기도 하고 누구한테나 위압감이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부드럽게 자비를 보여주는 노파친절한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일컫는 말이다.
괴겁의 대화(大火)는 일찍이 밝았건만 劫火曾洞然
허수아비는 먼저 눈물 떨군다네 木人淚先落
참으로 가련하구나 저 부대사여 可憐傅大師
곳곳에 머무를 누각조차 없구나 處處失樓閣
옛적 한고추라 불린 덕운비구는 德雲閑古錐
몇 차례나 묘봉정을 내려갔던가 幾下妙峰頂
그를 치성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喚他癡聖人
눈으로 우물 메우기 때문이라네 擔雪共填井
한고추 - 고뇌에 찬 마음이 편안하게 닻을 내릴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 가 되고 싶다. 한 발짝 내딛기 힘든 육신을 위해 에너지를 듬뿍 주는 한고추가 되고 싶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지친 영혼도 많고 가누기 힘든 육신의 장애인도 많기 때문이다. 지체가 높을수록 위압감에 눌려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도 많다. 많은 수행을 했다하여도 무슨 격식을 따지기나 좋아하고 낮은 곳에 손을 내밀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종교는 구원을 떠나서는 존재 의미가 희석될 뿐이다.
사람이 마시는 물도 물고기에게는 주거지가 되고 영가에게는 감로수가 된다. 물이 대상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몸을 나툰다. 한 모습만 고집한다면 이미 물의 속성을 스스로 잃고 말 것이다. 석존은 14무기(無記)에서 외도의 질문을 받는다. ‘세상은 영원한가, 아니면 무상한가.’ 이에 영원하다고도 무상하다고도 답하지 않았다. 이 또한 명안종사의 노파친절한 표본이 아닐까. 세상에는 트레바리만 있는 것 같아도 어딘가에 한고추는 자비의 미소로 우리를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