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

2011-10-18     현각 스님

금년 여름은 장마가 끝났어도 폭염 대신 연일 비가 내리니 권태를 느낄 만도 하다. 이러다 보니 그 어린 시절의 여름밤이 그리워진다. 여름밤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머리 위에서 별들의 향연을 볼 수 있다. 누군가가 광기가 넘쳐 값진 보석을 천상에 흩뿌려 놓았을까. 그 영롱하게 반짝이던 별빛을 보며 소년의 꿈은 영글어 갔다.

별은 그리운 얼굴들이 아니던가. 마치 연지(蓮池)에 핀 소담한 연꽃으로 보이기도 하고, 아직 수줍어 얼굴을 다 드러내지 않고 문설주에 기대어 모습을 반쯤만 드러낸 수줍은 소녀 마냥 보이기도 했다. 연기를 좋아한다는 모기를 쫓기 위하여 보리괴끼를 한 움큼 모깃불에 올려놓으면 주변은 연기로 뒤범벅이 되고 눈물이 찔끔찔끔 그칠 줄 모른다.

요사이 남산을 걷는 것을 건강 유지 비결쯤으로 생각하며 매일 걸으려고 한다. 장마가 심술을 부려 산행을 쉬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비가 오고 난 끝에 산길은 정말 그 맛이 다르다. 산의 향기가 비리 한듯하기도 하고 옥잠화의 꽃향기가 서리서리 풍겨 문득 문득 발길을 잡기도 한다. 이런 때면 자연의 맛을 맘껏 느끼고자 심호흡을 해 본다. 아니다. 심호흡마저도 물욕(物慾)이 과한 것이 아닐까 하여 이내 멈추기를 반복한다.

수행이란 무엇일까. 행실이나 학문 따위를 닦는 것이 수행이라고 사전에 기술되어 있다. 닦을 수(修), 행할 행(行). 불도를 닦는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전적 의미로만 수행을 이해하려고 하면 확연치 않다. 범어로 pratipatti 가 수행이다. 동사는 pratipad 로 ‘당도하다, 얻는다’는 뜻이다. 명사의 뜻으로는 ‘확인’이나 ‘지식’의 뜻을 넘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혹은 무엇이 행해졌는지를 안다’는 뜻이 훨씬 명료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옛부터 인디언들은 환상여행(vision quest)을 한다고 한다. 혼자서 일정기간 동안 자연의 품에 안긴다고 한다. 그 속에서 위대한 신비를 맞아들이고 환희를 맛본다는 것이다. 그 다음 고착화된 기성 세계의 진리를 넘어 몸소 체험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즉 정신과 육신의 탁기(濁氣)를 씻어내는 정화작업으로 세상의 신비로운 체험을 만끽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행은 비단 인디언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인도에서도 행해졌던 ‘마음닦기’의 한 형태였다.

불교 이전에도 수행의 한 형태로 요가수행이 행해지고 있었다. 요가는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수행방법이었다. 해탈이라는 자기만족을 위한 수행을 뛰어넘어 석존의 수행은 번뇌에 찌들고 병든 사람들을 깊이 관찰하고 안락하게 이끄는 방법을 생각한 수행이었다.

선은 사유수(思惟修)라 하기도 하고 정려(靜慮)라 하기도 하는데 구역(舊譯)과 신역의 표현이다. 선나(禪那)는 음역이다. 선이란 말이 최초로 나타난 문헌은 찬도갸 우파니샤드(Chāndogya Upanishad) 이다. 여기에서 선(Dhyāna)은 만유원리의 하나로 받아들여져 ‘숙고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dhi’는 ‘심사숙고하다’이고, ‘ya’ 는 ‘들어가다’이며, ‘na’는 ‘나타나다’이다. 종합해보면 ‘깊은 명상에 몰입하면 제법실상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동사는 ‘dhyai’로 ‘깊이 생각한다’는 말이다.

<사기> 봉선서(封禪書) 편에 천자가 지내는 제사를 봉선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봉은 사방의 흙을 높이 쌓아 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다. 선은 땅을 정하게 하여 산천에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특히 산에 제사지내는 것을 기현(庪縣)이라 하고, 하천에 제사지내는 것을 부침(浮沈)이라 하였다.

몇 일간 장마에 누전이 되어 불을 밝힐 수가 없게 되었다. 잊고 살았던 발명왕 에디슨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는 날이었다. 예전 같으면 송명(松明)이라도 밝혀 어둠을 퇴치할 수 있었지만 그런 관솔도 흔치 않은 세상이 되었으니 촛불에 의지할 밖에 어쩔 도리가 없다. 불현듯 안식(眼識)에만 신경 쓰고 걱정하는 인간의 단편적인 삶에 조소를 보낸다. 의식(意識) 즉 마음의 무명에는 대책을 세우는 일 등 속절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다니, 인간은 이렇게 현상에 매몰되고 마는 존재인가 의문을 던지게 된다.

뱃사람이 행복했을 때는 고기를 많이 잡았을 때가 아닌 뱃전에 올라섰을 때라고 한다. 중생의 고뇌를 치유하기 위해 고행했던 석존의 모습에서 한없는 경이로움과 자기정화를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