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상주

2011-10-18     현각 스님

더위가 치성하면 못내 그리운 것이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다. 합죽선 하나쯤 들고 다니면 더위가 해결되던 시절도 있었건만 요즘은 그걸로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손에는 얼음이 담긴 컵을 들고 주변엔 선풍기나 에어컨이 필수인 세상이 되었다. 현대인에게 뭔가 감내(堪耐)한다는 것은 타인의 일이다. 어디 덥고 추운 것뿐이랴. 온갖 감정들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 백색 천에는 한동안 어떠한 영상물도 보이지 않는다. 한참 지나야 영화가 상영된다. 그 내용에는 사랑과 질투, 용기와 비굴, 좌절과 승리 등 다양한 내용이 마음을 감동시켜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만약에 관객이 영화의 내용에 사로잡혀 일상생활을 한다면 퍽이나 불편할 일이다. 영화가 끝나면 조금 전의 상황은 모두 지워지고 백색의 천만 남는다. 내 생각이 작용하면 삼라만상이 전개되고 내 생각이 쉬면 주변 모두가 종식되고 만다. 생각은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공평무사 하다. 아마 자유방임주의자가 아닐까 한다.

마조의 법을 이은 마곡보철(麻谷宝徹) 선사가 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찌는 듯 더운 날 방에서 한 사람이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쫓고 있었다. 거기에 한 객승이 방문하였다. 잠깐 수인사를 한 후, 그 객승은 돌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바람의 본질은 언제나, 어디서나 변함없이 부는 것이 아닙니까.”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보철 선사께서는 새삼스러이 부채를 사용하십니까?”

그에 대해 선사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객승은 뭔가 느낀 바가 있어 마음속 깊이 경배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오등회원(五燈會元)> 보철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객승이 느낀 것은 무엇일까. 바람의 본성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다. 더워서 시원한 바람을 원하면 어느 곳에도 시원한 바람은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바람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람을 원한다고 생각만 하면 바람이 곧 바로 손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부채를 들고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어느 탐구심 강렬한 사람이 바람의 모습을 확연히 보기 위하여 바람을 멈추게 하면 그 때 바람은 그 속성을 상실하고 만다. 그렇다고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다해 바람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설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풍성상주(風性常住)’라는 공안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가 있다. 사람의 마음에 본래 내재해 있는 불성(佛性)은 사람마다 수행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고, 신체 가운데에도 있는 것이다. 수행 과정에 나타나는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제일 떨치기 어려운 것이 번뇌가 아닐까 한다. 번뇌는 꼭 버려야만 하는 쓰레기 같은 것만은 아니다. 번뇌도 소중한 것이라고 본다. 마치 굴 껍질 속에 성가신 목새가 아름답고 값진 진주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생사 즉 열반이요, 번뇌 즉 보리’라는 말도 모두 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번뇌를 소멸하고 나야 만이 보리를 증득 할 수 있다는 것도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연유한 것이다. 번뇌를 몽땅 뽑아내어 소멸시키려는 태도는 흡사 그림자를 상자 속에 담으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벗어나려고 한 만큼 이내 따라 붙는 속성을 지닌 것이 번뇌의 진면목인 것이다.

집의 경계는 울타리가 된다. 울타리는 영역의 경계이기도 하다. 경계의 울타리를 작게 치는 것이 손해인 듯 여기기 쉽다. 그러나 내실은 그렇지 않다. 지녀서 받는 고통은 무엇에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반면에 마음의 울타리는 크게 치면 칠수록 마음의 안락은 더 없이 증폭된다. 마치 자연의 넉넉한 품만큼이나 여유로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바람이나 물에 흘러내리는 유사(流砂) 마냥 자유롭기 그지없는 일이다.

‘팽팽하게 당겨지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stringere에서 유래된 스트레스란 말도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스트레스는 당겨지는 것만이 아니라 느슨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달려있다. 인간이 그토록 희구하는 수명장수를 생각해 보자. 노후 설계가 잘 된 사람의 경우 수명장수는 분명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노후가 보장되지 않고 질병에 시달리는 장수는 자신은 물론 주변에 대단한 스트레스일 뿐이다.

바람이 상주 하듯이 어느 강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는 손놀림에는 분명 불성이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