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유수
구름과 안개가 자주 대지를 감싼다. 떠가는 구름은 고정된 형태를 고집하지 않고 높은 봉우리를 만나면 감돌아 가고 평원을 만나면 온갖 자태를 드러내며 흘러간다. 문수봉과 보현봉을 안고도는 구름은 봉을 안았다가 봉 마저도 허용하지 않고 묻어버리기도 하는 묘용이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만의 오묘함이 아닐까 한다. 일순간도 같은 모양으로 머물지 않는 구름에서 소멸의 이치를 배운다. 악지가 세 누군가가 체벌을 가하여 순치시켜 놓은 것도 아니련만 저리도 유유자적 할 수 있단 말인가.
태양에 이르고자 하여 날개를 만들었다는 이카루스의 신화는 인류가 추구한 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구름은 날개도 없이 허공에 온갖 모양을 드러내어 인간의 가지가지 상념을 속속들이 파헤쳐 놓고 몽당붓 한 자루 없이 천태만상을 그려내고 있을까. 새삼스레 자연의 오묘함이 여기에 깃들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저 작은 물방울 입자가 모여 안개를 이루고 있다. 안개의 여유를 생각해 본다. 무거우면 낑낑대며 그 질량을 지니고 있으려 하지 않고 대지에 그냥 부려 놓고 만다. 가벼워 견딜만 하면 흘러흘러 어느 나뭇가지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구름과 안개에서 집착이란 정말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마냥 흘러가고 안주함을 자유자재로 한다.
선수행자를 운수(雲水)라고 부른다. 운수란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약자이다. 수행자는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다. 마치 떠도는 구름 같이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수행자의 생활 상태를 잘 드러낸 말이다. 다투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혹여 구름이 계곡의 물과 같이 졸졸 소리내며 계곡을 굽이쳐 흘러가고자 유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물 또한 낮은 곳에 있음을 자탄하며 높은 곳에 있는 구름의 영역을 넘겨보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여건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운형수제(雲兄水弟)라 했던가.
<식경록개연보설(息耕錄開筵普說)>에 ‘귀를 막고 눈을 가려 번뇌를 피할 수 있다 해도 행운유수 추엽비화(墜葉飛花)를 어찌 멈추게 할 수 있으랴’라고 읊고 있다. 행운유수와 추엽비화란 결국 허공을 떠도는 구름, 강을 흐르는 물, 나무에서 떨어지는 마른 잎, 초목에서 흩날리는 꽃은 자연이다. 세상의 무상을 표현한 말이요 제행무상을 표현한 적절한 의미이기도 하다.
행운유수와 유사한 말로 운유평기(雲遊萍寄)란 말이 있다. 구름이 광대한 허공을 떠가는 한 곳에 한 순간에도 머물지 않듯이 부평초는 흐르는 물에 몸을 의지하여 표류한다는 말이다. 운유평기 또한 수행자는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경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비단 수행자가 아니라 해도 한 곳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 걸어야 한다. 걷는다는 것은 우리 신체가 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일이다. 이 단계를 넘어 속보경기에 나가고자 하는 선수의 걷기는 평범의 단계를 훨씬 넘고 만다. 거기에는 정교함이 따라야 하고 그러자면 일정한 시간을 내어 반복된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사람은 걷기의 재미 보다는 어떤 의무감으로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이 있다. 느끼고 취하는 습성이다. 무감각한 눈은 추한 광경만을 눈 여겨 보고, 음악적 감각이 굼뜬 귀로는 소음만을 들을 것이다. 세잔느의 <목욕하는 사람들>이란 작품을 보고 터질 듯한 살결과 숨 쉬는 맥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베토벤의 제5번 <운명교향곡>에서 베토벤이 제1악장 첫머리의 동기에 대하여 자신이 ‘이와 같이 운명은 문을 두드린다’라고 말했듯이 그 운명의 선율은 나의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닐까 반문할 때 이미 곡에 취하고 마는 것이다.
권세에 물들고 재물에 오염된 자들이여! 행운유수에서 여여함을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