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18     현각 스님

종강시간이 되었다. 이 무렵이 되면 늘 자신에게 반문해 본다. 얼마만한 편달이 있었는지. 편달과 편복(鞭扑)은 동의어이다. 채찍 편(鞭) 자는 사람을 지도하는 회초리를 뜻하고, 매질할 달(撻) 자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때린다는 말이다. 칠 복(扑) 자 또한 종아리채로 때린다는 뜻이다.

이번 강좌에 죽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수가 열심히 정진하였으나 개중에는 앉으면 이내 방아 찧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죽비선물이 가기 마련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귀는 귀하게 여기고 의식은 천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 졸다가도 방선 죽비소리는 영롱하게 알아듣고 자세를 푼다. 약산유엄 선사가 이고에게 “어찌 귀는 귀하게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는가?”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장마를 대비하여 농부는 부실한 둑을 편비내 한다. 우리도 알찬 미래를 위해 대비해야 할 일이 많다. 그래야 발전을 기약할 수도 있다. 근자에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말을 잔소리쯤으로 치부해 버리기 일쑤 이다. 그러나 예전의 구법자들은 그 양상이 영 딴판이었다.

운문의 눈을 뜨게 한 스승은 목주(睦州; ?~850) 선사 였다. 황벽희운의 제자로 호를 진존숙(陳尊宿)이라 하였다. 선사의 가풍은 누가 찾아오면 문을 닫아 버렸다. 운문이 처음 찾아 갔을 때도 역시 문을 닫고 “누구냐”고 벽력 같이 소리를 질렀다. “운문입니다”라고 문밖에서 대답했다. “무엇 때문에 왔는가.” “스님의 지도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때 문을 삐주룩하게 열고 운문의 얼굴을 잠간 내다보고는 그만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운문은 연 사흘 동안이나 이 지경을 당했다. 나흘째 되는 날 만일 목주 선사가 문을 열기만 하면 그 틈을 타서 들어 갈 작정을 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방에 들어갔다. 이때 운문의 멱살을 잡고 한마디 일러보라고 다그쳤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운문을 밖으로 내치면서 하는 말이 “진시지도역찬(秦時之鍍轢鑽)”이라고 했다. 이 말은 진시황 35년 상림원(上林苑)에 아방궁(阿房宮)을 지을 때 쓴 큰 못이다. 이 못은 너무 커서 보통 집에서는 쓰지 못한다.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밥벌레라고 욕지거리 할 때 쓰는 말이 되었다. 이 밥통 같은 녀석이라고 떠밀어 댔을 때 운문의 한 쪽 발이 문틈에 끼었다. “아이구 아파라”라고 비명을 지를 때 크게 깨치게 되었다. 후일 이렇게 깨달은 운문은 동산을 가르친다.

<무문관> 제15칙에 동산삼돈(洞山三頓)이다.

운문 선사에게 동산이 찾아오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동산은 “사도(査渡)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래 하안거는 어디서 났는고.” “예, 호남의 보자사(報慈寺)에서 지냈습니다.” “어느 때 그곳을 떠났는고.” “8월 25일에 떠났습니다.” 이 때 운문 선사가 “그대에게 삼돈방을 때릴 것이나 용서한다.” 동산이 이튿날 운문 선사를 찾아 물었다. “어제 스님으로부터 ‘삼돈방을 때릴 것이나 용서한다’ 하셨으니 허물이 어디 있습니까?” “이 바보야. 강서 · 호남하고 어디로 돌아다닌단 말이야.” 동산은 이때 대오했다.

선에서는 삼돈방 뿐만 아니라 일돈방(一頓棒), 삼십돈방(三十頓棒)도 말한다. 일돈(一頓)이란 곤장을 한 번 치는 것이다. 몰록 돈(頓) 자로 흔히 알고 있는 돈은 곤장을 치는 횟수를 말한다. 원래 중국에서 죄인을 벌주기 위하여 곤장으로 때렸다. 형법에서 일돈을 20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선원에서 삼돈방은 횟수로 60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삼이란 숫자는 횟수가 많다는 말이지 실수(實數)의 삼(三)은 아니다. 방(棒)이 스승의 자비심으로 학인의 수행을 경책하기 위한 방편인데 여기에 무슨 폭력의 의미가 조금인들 있겠는가. <임제록>은 임제 선사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상당·시중(示衆)·감변·행록(行錄)의 4장으로 나누어 있다. 상당(上堂)에서는 일돈방이 감변(勘辨)에서는 삼십방이 나온다. 덕산이 수시(垂示)하기를 “도를 깨쳤다고 해도 삼십방이요, 도를 깨치지 못했다 해도 삼십방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방이 자비심으로 학인의 수도 경지를 경책하는 선사의 필수적인 도구이듯이 편달도 스승의 사랑이 담긴 도구임에 의심할 바 없다. 제아무리 유용한 정보라도 이용자가 찾아내지 못하면 쓸모가 없듯이 방의 경책을 거부하는 수행자에게는 선지식의 가르침도 부질없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의미 없이 나부끼는 개지의 나부낌이 되고 말 것이다. 깨어 있는 자만이 진보가 있고 기약이 있다. 깨어있는 자에게 한마디의 말이나 단어 하나가 새로운 세계의 창을 열어주는 동력이 될 수 있으며 정신세계의 내적인 여행을 하기에 충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