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자취를 발견하다.

2011-10-18     현각 스님

어느 과학자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방 안에 소파, 조명, 책상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을 마련해 두었다. 사람은 앞에 시설물이 모두 보였다. 그런데 같은 방이지만 개에게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과 소파는 보여도 책상과 조명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의 입장이 되면 조명과 음식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각각의 주체에 따라 의미가 있는 것만 존재한다는 것이 환(環)세계의 개념이라고 한다.

사람은 방에 놓인 모든 사물이 다 보였다고 하니 개나 파리의 경지에서 보면 뛰어난 영물임에 틀림없다. ‘본다’라고 할 경우 단순히 보이는 대상만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육안으로 헤아려 보기에 불가능한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 보이는 것은 눈의 작용이다. 범어로 눈(眼)에 해당 되는 말은 다양하다. Cakshu는 ‘눈’이고 netra 는 ‘안내자’의 의미가 있다. 정작 ‘본다’에 적절한 말은 dṛis 이다. 그저 눈 앞에 전개되는 사물을 시야에 들어오니까 본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마음으로 익히고, 이해해서 본다’ 던가 ‘순수직관을 통해 생각하고 발견하여 본다’는 말이다. 여기서 ‘철학’이란 의미의 darṡana가 나왔다.

중생세계를 Saha loka라 한다. saha는 ‘참는다’ 혹은 ‘힘이 센’의 뜻이고 loka는 ‘세상’의 뜻이다. 그러니까 중생세계는 ‘참아야 하는 세계’란 말이다. 서로 간에 더 갖고 싶고, 더 누리고 싶고, 더 즐기고 싶고, 더 오르고 싶은 마음이 그칠 줄 모르고 불타는 세계다. 행짜가 만연한 세계이기도 하다. 베거리쯤이야 예사로운 일이고 주변에서 지나치게 애발라 인심을 잃는 정도야 다반사이다. 몽골에 바람이 모래를 운반하여 만든 사구(砂丘)를 홍고린 엘스라고 한다. 이 열악한 현장에서도 적자생존의 엄연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바로 사바세계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Vedya loka가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다. vedya는 ‘모든 것이 성취됐다’는 말이다. 성취된 세계에서 무엇을 더 갖고자 마음 쓸 일이 있겠는가. 이 세계는 ‘부처님의 세계’이고 ‘진리의 세계’이기도 하다. 누구나 수행이란 정밀한 여과기를 탈 없이 통과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숭고하고 지고한 세계다.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見跡)는 말은 십우도(十牛圖)에 나오는 말이다. 십우도는 심우도(尋牛圖)라고도 불린다. 십우도는 곽암(廓庵) 스님이 유달리 선수행을 소 찾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다른 것들과 비교해 특이하다. 즉 다른 것들에는 검은 소가 조련돼 순백의 소로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곽암은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서서 소를 보고 잡아끌어서 마침내 소와 내가 하나가 되어 결국 공적(空寂)이 되고, 다시 애당초 일상생활로 되돌아가는 차례를 그리고 있다. 이것은 당(唐)대의 선의 특징을 이뤘던 평상심의 불도를 자각의 과정으로 대치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작용을 잘 다룬 곽암의 <십우도>가 가장 널리 유행할 수밖에 없었다.

왜 소가 선 수행과 관계가 있을까. 소가 인도나 중국에서 태고적부터 삶의 중요한 한 영역을 담당했고 농경사회에서 필수적인 동물인 까닭이다. 세존의 성이 고다마(Gōtama)인데 Gō는 ‘소’이고 tama는 ‘~을 가장 숭상하다’, ‘~을 가장 좋아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소 토템을 씨족성으로 한 것이다. 소를 성물로 인정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함곡관에서 노자(老子)가 소를 타고 나오는 이미지는 소의 종교적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당(唐)대의 선원에서는 소를 사육했다. 선종이 율가(律家)에서 더부살이 하던 것을 떨치고 자급자족하는 수행집단으로 변혁될 때, 선농일치적 수행관에 입각해 선원에서 소를 사육했던 것이다.

견적(見跡)이란 수행에 있어서, 무엇인가 알듯말듯한 경지를 보인 것이다. ‘선무당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얄팍하게 아는 지식으로 전체인양 보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자기의 조그만 식견을 가지고 사물을 이해하려고도 한다. 스스로 전체를 터득하기 보다는 미리 예단하고 결론지어 주관적 해석을 내려버리기 쉽다. 자기식의 언어구사는 곧 진실을 왜곡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며 큰 화를 불러오게 된다.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은 불완전한 지식을 빗댄 말이다. 견적에서 가르침은 어설픈 깨침으로 세상을 망치는 사기꾼을 경계하라는 내용이다. 모르면서 안다는 것도 무서운 사기이지만, 불완전한 지식으로 세상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인을 경계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위선의 허물을 벗고 거짓의 탈을 벗어던지고 진솔하게 인생을 논해보자. 이것이 ‘나’라고 떳떳이 얘기하는 자세부터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