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아의 검 -Ⅳ. 철의 산 차크라발라 (12)

2011-10-18     고지연

난다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칠흑 같은 어둠도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진 못했다. 어둠이 주는 공포, 발을 잘 못 디딜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수아킴이 보여준 욕망이라는 더 큰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난다는 수아킴의 끈적거리는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만 같아 동굴의 끝을 향해 더 힘껏 달려갔다. 저 멀리 옅지만 분명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출구가 보였다. 난다를 소리 없이 뒤쫓던 두려움도 서서히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동굴의 끝에 다다른 난다는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여전히 동굴의 높이는 낮은 계단 한 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어 보았다. 무언가에 부딪힌 것처럼 발이 튕겨져 나왔다. “왜 이러지?” 난다는 다시 발을 내밀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동굴 밖으론 손도 뻗을 수 없었다. 마치 앞에 투명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난다는 보이지 않는 그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색도 형체도 없는 그 벽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깨지거나 부서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난다는 자신이 뛰어왔던 어두운 동굴 쪽을 뒤돌아보았다. 그는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려 온 힘을 다해 달려왔다.

절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

난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벽을 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난다는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투명했던 벽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주 약하게나마 동굴 밖 마을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기운도 느껴졌다. 난다는 온 마음을 벽을 깨는 일에만 집중했다. 이윽고 손이 동굴 밖으로 쑥 뻗어나갔다. 벽이 사라진 것이었다. 난다는 그제야 가쁜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발은 바닥에 바로 닿았다. 처음처럼 한 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난다는 잠시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동굴 쪽을 다시 쳐다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빨리 무니를 만나야 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무니가 갇혀있는 곳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무니는 그곳에 없었다. 칸타카만이 꼬리를 흔들며 난다를 반길 뿐이었다.

칸타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니는 어디로 갔지?”

칸타나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풀피리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다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루나검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니는 스스로 이곳을 빠져나갔다는 뜻일까. 갑자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보리 짚단 뒤에서 쏘옥 내민 얼굴이 보였다.

데비?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데비는 머리에 붙어있던 지푸라기를 떼어내며 대답했다.

여기? 비 오는 날 왔는데. 사람들이 날 보면 안 된다고 그래서, 여기 숨어있었어.”

무니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는 거야?”

데비는 .”이라고 대답하며, 언제나처럼 칸타카에게 쪼르르 달려가 매달렸다.

그럼 내가 저번에 여기 왔을 때도 지금처럼 숨어있었어?”

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무니는 널 찾았다는 걸 내게 말하지 않은 거지?”

옷에 피가 묻어서라고 했어. 내가 키 큰 사람이 여자애를 밀어서 피가 나는 걸 봤거든.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아직은 난다한테도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마음이 많이 아플 텐 데, 머리까지 아프게 할 수는 없잖아라고.”

난다는 무니의 그러한 배려를 알게 되자 또 다시 마음이 아파왔다. 그들에게 죽음은 언제나 슬픔과 곧바로 닿아있는 사건이었다. 분명 무니도 수아나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쎄라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니는 어디에 간 거야?”

데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몰라. ‘데비, 넌 여기 꼼짝 말고 있어라고 하더니 휭 나가버렸는걸.”

난다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니는 이곳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진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터였다. ‘혼자서 여길 빠져나간 이유가 뭐야?’ 어쩌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 지도 몰랐다.

무니를 찾아봐야겠어.”

난다의 그 말에 데비가 고개를 또 다시 저었다.

찾을 수 없어.”

난다는 무슨 말이냐는 듯 데비의 얼굴을 쳐다봤다.

찾을 수 없을 거야, .”

그게 무슨 뜻이야? 여기선 무니를 찾을 수 없다고?”

데비는 말간 눈으로 난다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냐니까? 혹시 무니가 무슨 다른 말이라도 하고 나간 거야?”

난다는 재차 물었다. 하지만 데비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난다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말대로 무니가 여기에 없다고 하자. 그래도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아봐야할 거 아니야.”

데비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난다는 답답함에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나는 무니를 찾아볼 테니까, 너는 아까처럼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사람들한테 들 키면 안 돼.”

난다는 단단히 당부를 한 다음, 칸타카의 등을 한 번 두들겨준 후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때였다.

우리도 같이 가.”

데비가 말했다.

같이 가겠다고?”

. 우리 모두 같이 가는 게 좋아.”

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녀의 시선은 난다를 정면으로 응시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데비가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걸 처음 보는 거 같았다. ‘도대체 너는 어떤 아이니?’ 난다는 그런 소녀의 눈을 향해 마음 속 질문을 던졌다. 난다의 의문을 알아차린 것일까. 데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내 눈만 쳐다봐? 내 눈엔 아무 것도 없는데.”

데비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난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러게. 난 네 눈 속으로 무니가 사라졌나 했지. 그리고…….”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난다의 입 꼬리가 갑자기 축 쳐졌다.

사르나트도 말이야.”

사르나트? 그게 뭐야?”

데비가 물었다. 난다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크기의 원 안에 각기 다른 색의 수레바퀴 네 개가 들어있거든. 이 중에 나무로 된 바퀴는 간혹 돌아갔다, 멈췄다가 하기도 해. 너도 여러 번 본 적 있잖아. 내가 늘 가지 고 다녔으니까.”

데비는 ……, 그거.”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그거 본 적 있는데.”

난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디서?”

그 동굴 앞에 있어.”

무심히 대답하는 데비의 얼굴을 난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기가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오고 갔던 곳이다. ‘거기에 왜 사르나트가 떨어져있지?’ 어쩌면 차크라발라로 착륙하는 동안 떨어트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안 갈 거야?”

어느 새 칸타카의 등에 올라탄 데비가 난다를 재촉하듯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우리 다 같이 여기서 나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

난다는 결국 헛간 문을 열었다. 칸타카가 그런 그를 격려하듯 낮은 풀피리 소리를 냈다.

 

마을은 여전히 조용했다. 이미 끝난 수아나의 장례 때문이 아니라 잠부에서 도착한 배 때문일 것이다. 난다는 이 소박한 마을에서 느꼈던 정다운 온기가 어쩌면 곧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텅 빈 마을을 보는 마음이 울적했다. 하지만 아픈 기억과 슬픔은 어쩔 수 없이 남는 발자국 같은 것이었다. 무니와 난다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이미 지나온 발자국의 크기를 가늠해 본들, 지금의 그들에게는 무의미했다.

무니는…….”

헛간을 나섰음에도 난다가 아무런 말이 없자, 데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다는 그녀가 무니의 이름을 이제까지 한 번도 제대로 부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늘의 데비는 여느 때와는 정말 많이 달랐다.

무니가 뭐?”

여기 없어. 찾을 수 없을 거야. 우린 이곳을 떠나는 게 좋아. 칸타카, 너도 그렇게 생각 하지?”

칸타카는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칸타카, 너까지?’ 난다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 난감했다. ‘그래! 그럼 데비 말대로 일단 사르나트부터 찾으러 가보자.’ 차크라발라에 도착했을 때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사르나트가 떠올라 불안감이 스쳤지만,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경로는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곳에서 무니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저나. 무니는 정말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난다는 데비를 쳐다봤다. 데비는 또다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말간 눈빛으로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세상에 하나 뿐인 친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앞길을 알려주던 사르나트, 둘 다를 잃어버린 난다 역시 그 하늘을 바라봤다. ‘그래도 이제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그들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4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