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아의 검 -Ⅳ. 철의 산 차크라발라 (11)
“그러니까, 이제 그럼 설탕과 철을 교환하기로 했다는 건가요?”
나크는 난다가 다시 끼어들자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설탕뿐만이 아니야. 잠부에서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제공하겠다고 했다는군.”
나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덧붙였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설탕이란 게 입에만 달콤하지, 좋은 점이 하나도 없거든. 쉽게 스르르 녹아 사라지고, 기분 나쁘게 끈적이기까지 하지. 그런데도 인간들은 한 번 그 맛을 보면 빠져나오질 못해. 쯧쯧.”
그는 안타까움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제야 난다는 자신이 느꼈던 낯설고 이상한 느낌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분명히 알 거 같았다. 수아나를 찾아 헤맸던 그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수아킴의 끈적거리던 손과 잠부의 배가 도착했다며 들떠있던 그의 목소리. 하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다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괴로운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나크는 이유를 아는 지, 모르는 지 또다시 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무니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낮추고 집을 나섰다. 수아나의 부모가 나눴던 대화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태우던 옷이 수아나의 아빠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보다는 키가 크고 마른 남자에게 맞는 옷으로, 무니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수아킴의 옷을 태우고 있는 것일까.
“흠. 저것도 풍습인가.”
하지만 딸의 장례가 있는 날에 아들의 옷을 태우며 우는 부모라니, 이상했다. 무니는 일단 소녀가 발견 되었다는 동굴의 반대편 입구 쪽으로 다시 가보기로 했다. 질퍽거리는 길에 발자국만 한 쌍씩 찍히기 시작했다.
동굴의 입구는 무니가 떨어졌을 때 봤던 그대로 지면보다 아주 조금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처음에 그곳에서 떨어질 때는 아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았었다. 난다의 말로는 일종의 결계 같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발을 동굴 쪽으로 올려보았다.
“어라? 그냥 닿잖아?”
무니는 생각과 달리 쉽게 어두운 동굴 안쪽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칸타카도 없었다. 등잔을 챙겨올 생각도 못했다니! ‘돌아갈까?’ 망설여졌지만, 무니는 이내 마음을 바꾸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동굴 안으로 향했다. 차라리 눈을 감았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뭐 어때? 그냥 걷는 거잖아!”
그러나 막상 어둠 속에서 걷는 건 그냥 걷는 게 아니었다. 씩씩했던 무니의 발걸음에 조금씩 힘이 빠졌다.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자꾸 자신이 가면 안 되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꼭 동굴 벽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무니는 동굴 안에 자신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주는 압박 때문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부분이었다. 무니는 발끝을 세우고 조심조심 걸었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걱정했던 대로 결국 동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벽은 아니었다. 무니는 감았던 눈을 떴다. 여전한 어둠이었지만, 동굴의 반대편 입구와 가까워진 느낌으로 칠흑같이 어둡지만은 않았다. 무니는 자신이 부딪혔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그것은 자루였다. 누군가 커다란 자루들을 동굴의 벽 쪽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거 같았다. 처음엔 보릿가루인가 싶었지만 자루에 부딪혔을 때의 촉감을 생각해보니 결이 고운 곡물 가루는 아닌 듯 했다. 무니는 허리춤에 있던 아루나검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역시 신중하게 자루 하나를 칼로 뚫었다. 그러자 차르르하는 소리를 내며 가루가 쏟아졌다. 무니는 손가락으로 가루를 찍어 맛 봤다.
“설탕이잖아?”
‘설탕?’ 난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들이 희미하게나마 하나로 모이는 느낌이었다. 무니는 미간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더 무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칸타카?” 무니가 속삭이듯 말의 이름을 불렀다. 그 말에 대답하듯 다시 풀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바로 무니 앞까지 다가온 거 같았다.
“거기 칸타카인 거야?”
무니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며 다시 물었다. 풀피리 소리 대신 “아니!”라고 대답하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니는 흠칫 놀라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어이쿠. 조심해야하지 않겠니?”
목소리의 주인공이 무니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말랑말랑한 손이네.’ 무니는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지? 잠부어를 하다니.’
“글쎄, 내가 누구일까?”
상대는 마치 무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대답했다. 그리고 무니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런데 너는 누구지?”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어두웠던 주위가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러게. 나는 누구지?’ 무니는 자신의 의식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너무 밝아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로 몸과 마음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한편, 난다 역시 동굴을 향해 있는 힘껏 뛰어갔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뒤통수를 계속해서 잡아당겼지만 진실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수아나가 발견됐던 바위가 보였다. 동굴 입구에 있는 것들 중에선 가장 크기가 큰 바위로 어린 여자애가 자기 몸 하나 숨기기에 적당했다. 난다는 종이버터로 등불을 밝히고 수아나가 봤을 장면들을 생각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자신이 짐작했던 걸 발견했다. 처음에 무니를 뒤쫓아 동굴에 들어섰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설탕 자루였다. 꽤 많은 양이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난다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수아킴이 서 있었다.
“잠부어를 할 줄 아는 거예요?”
“조금은.”
수아킴이 난다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지금의 그 모습은 수아나의 다정한 오빠라기보다는 그냥 한 사람의 어른 같았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지 물었는데?”
“당신이 보고 있는 그대로예요. 이건 모두 설탕인가요?”
“응. 그래 그건 설탕이야. 그래서 뭐? 넌 이제 떠나야 하지 않아? 그 여자애는 이미 네 친구하고 함께 있을 텐데.”
“그 여자애?”
“사라졌다고 했던 그 소녀 말이야.”
“데비?” 난다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름은 나도 모르지.”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죠?”
“봤으니까. 수아나가 죽어버린 날, 내가 네 친구가 갇혀있는 창고까지 데려다 준 걸. 그 아인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하더군.”
“당신이 수아나를 죽인 거죠?”
“대답하고 싶지 않아. 그럴 이유도 없어.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럼 데첸은?”
“내가 대답을 하면 달라지는 게 있어?”
수아킴은 덤덤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이유가 뭐야?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고 여동생이라구요. 고작 이 설탕 때문인가요?”
“설탕은 달콤하지. 사람들 모두 좋아해. 사람들은 내내 설탕 이야길 했어. 그 맛은 잊히지 않거든.”
난다는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라고 외쳤다.
“데첸 역시 마찬가지였지. 잠부에 다녀온 후론 언제나 그 이야기였어. 달콤한 것들에 관 한 이야기. 오직 데첸 자신 만이 맛보았다는 듯. 데첸은 정말 잠부를 좋아했어.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듯.”
“그럼 수아나는 왜?”
난다는 수아킴이 하는 말 모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지 이유가 듣고 싶을 뿐인데, 알아들 수 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수아킴은 부드럽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유가 중요해? 그리고 내가 네 말대로 데첸과 수아나를 죽였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 지? 그 일에 대해 대가를 치루는 건 그 누구도 아닌 결국 나일 텐데. 그 대가가 이유에 따라 달라지는 건가?”
난다는 할 말을 잃은 듯 등불에 일렁거리는 수아킴의 얼굴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친 채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막상 엄청나고 충격적인 진실에 마주치자, 난다는 오히려 머리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은 이미 수아킴이 살인자라는 걸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변화 없던 수아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네 친구는 아마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차분한 말투였지만, 분명히 위협이었다. 난다는 다시 그의 눈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서 어둠 속을 걸어갔다. 무니를 만나고 싶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이렇게 알 수 없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래. 일단 무니하고 이야기를 하자. 그럼 모든 게 분명해질 거야!’ 난다는 동굴 끝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등 뒤로 수아킴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