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아의 검 -Ⅳ. 철의 산 차크라발라 (9)

2011-10-18     고지연

무니는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검 조각을 살폈다. 진주처럼 생긴 그것은 어둑한 방 안에서도 오묘한 색깔을 보이고 있었다. 무니는 집게손가락으로 그걸 비벼도 보고 튕겨보기도 하면서 궁리에 빠졌다. 그때 몸에 뭔가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 조각을 문지르던 손이 점차 투명해졌던 것이다. 무니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번개가 얼굴 위로 번쩍하고 빛을 내뿜었다. 무니는 다시 자신의 손바닥을 살폈다. 여전히 손은 사라진 채, 검 조각만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밖에서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사흘 째 비였다. 수아나 가족들도 차크라발라에 이렇게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건 처음 본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은 궂은 날씨 때문에 밭일이 여의치 않아 걱정이 될 법한데도 별 다른 근심이 없어 보였다. 하긴 애초에 걱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곳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조에게 먹일 보리 겨가 잔뜩 쌓여있고, 빵을 만들 보릿가루도 넉넉하니 언제나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걱정이라는 단어가 있었다면 모두들 자신들의 걱정, 그리고 공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수아나가 저녁 시간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보리밭의 물길을 살피러 간 오빠 수아킴을 찾아오겠다며 나간 게 소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난다는 초조한 표정으로 집안을 걸어 다니다가 또 창밖을 내다봤다. 컴컴한 바깥엔 세찬 빗줄기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찾으러 나가야하지 않을까요?”

난다가 나크를 통해 말을 전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수아나의 아빠가 결심한 듯, 수아킴을 보며 말했다.

나가보자꾸나. 수아나는 아마도 너와 길이 어긋나 헤매고 있을 게다. 몇몇 형제에게 도 도움을 청할 수 있겠지.”

부정적인 단어라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도 금기시 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해가 진 다음의 외출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차크라발라에는 밤은 악령들의 시간이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 왔다. 그러나 인간 쪽에서 그들의 영역과 시간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악령은 인간들에게 무해한 존재였다.

그래도 여보!”

수아나의 엄마가 비옷을 챙겨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서려던 남편의 옷깃을 붙잡았다. 얼굴엔 근심이 가득이었다. 남편은 그녀의 손을 한 번 잡아주더니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저도 함께 가겠어요!”

난다가 나크를 통해 말했다. 가족 모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수아킴이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난다에게 함께 가자는 고개 짓을 했다. 그렇게 남자 셋, 그리고 정령은 낯 선 비와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지만, 한 번 만에 열리는 경우는 없었다. 비 내리는 소리가 그만큼 세찼기 때문이다. 이웃들 모두 수아나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크라발라 사람들의 유대관계는 매우 친밀하기 때문에 내 자식, 남의 자식을 구분 지어 생각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수아나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모두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아이였다. 그들 대부분은 부탁도 하기 전에 나갈 채비를 했다. 물론 그들 중에도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수아킴은 난다에게 그들은 원래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라며, 그래도 문을 두드린 이유는 모두에게 부탁을 하는데 그들에게만 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난다는 이런 와중에도 사람들의 섭섭해 할까 배려하는 수아나의 가족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몇몇 무리로 나뉘어 수아나를 찾아다녔다. 수아킴과 난다는 차크라발라 계곡으로 통하는 동굴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어두운 동굴 속을 등불도 없이 익숙하게 걸어가는 것에 반해, 난다는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다. 보다 못했는지 수아킴이 !”하며 손을 내주었다. 난다는 그의 손에 의지해 어둠 속을 더듬어 걸어갔다. 터벅터벅하며 동굴 속을 살펴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만이 들려왔다. 난다는 수아킴의 끈적한 손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자신의 옷깃을 스쳐지나가는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이어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난다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여자애를 찾은 거야.”

바로 옆에서 나크가 속삭였다. 수아킴은 벌써 난다의 손을 놓아버리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동굴의 입구 쪽인 듯, 어둠이 옅어진 지점이었다. 난다도 그곳을 향해 곧바로 달려갔다. 급한 마음에 발을 헛디딜 사이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또 심장 한 곳을 아프게 찔렀다. 역시 나크의 말 대로였다. 동굴 입구의 커다란 바위 뒤에서 비를 맞으며 누워있는 사람은 분명 수아나였다. 사람들을 밀쳐내고 바위 옆으로 다가간 난다의 눈에 축 늘어진 수아나의 손이 들어왔다. 작고 따뜻했던 바로 그 손이었다. 난다는 그 손을 쥐어보았다. 차가웠다. 난다는 그 온도의 의미가 다시는 그 손을 잡을 수는 없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무니는 소란스러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잠에서 깬 칸타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살해당한 여자 아이의 장례 의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 그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었다. 이야기를 들려줄 때 난다는 무척 슬프고 지쳐 보였으며, 화가 나 있었다. 무니도 그 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쎄라를 닮은 예쁘고 귀여운 아이였다. 하지만 그 이야길 들었을 때, 무니는 무엇보다도 데비가 걱정 되었다.

도대체 누가 두 사람을 죽인 걸까, 칸타카?”

칸타카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 자를 찾아야 이곳을 떠날 수 있을 텐데.”

무니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여전히 화가 나 있는 난다의 모습도 보였다. 수아나의 가족들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무니의 마을에서도 죽음이라는 사건은 몹시 슬픈 것이었지만, 그 현상 자체에는 덤덤했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종말이라기보다는 단지 긴 이야기의 한 단락이 끝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은 이는 이웃의 손녀나 들판에 꽃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었다. 차크라발라 사람들의 생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수아나의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려 하지 않았다. 난다의 불만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마 수아나를 죽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무니는 창고의 구석 쪽을 돌아봤다. 거기에 무니 자신 역시 이곳을 쉽게 떠나자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잠들어 있었다. 세상모르고 푹 잠 든 데비였다. 수아나라는 아이가 죽은 채 발견 됐다는 그날, 무니가 갇혀있던 창고를 두드렸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도대체 데비는 어떻게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냈을까. 처음 창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는 바람 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마을 사람들이나 난다가 밤중에 무니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방 칸타카 거기 있어? 칸타카?”라는 데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니는 데비에게 칸타카와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려주고,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설마 문 여는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데비는 한참이나 문고리와 씨름을 했다. 또 다시 번쩍하고 번개가 하늘을 가르는 순간, 창고 문이 활짝 열리더니 데비가 나타났다.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 온 것인지, 거의 빗방울을 묻히지 않은 상태였다. 대신 옷 여기저기에 뭐가 튀었는지 얼룩덜룩했다. 그 오염물은 데비가 앞머리를 쓸어 올릴 때마다 이마와 코끝에도 흐릿한 흔적을 남겼다.

너 이거 뭐냐?”

그 질문에 데비는 자신의 옷과 손바닥을 쳐다봤다.

이거 피야. 어떤 사람이 어떤 여자애를 밀었어. 여자애가 그 사람을 몰래 보고 있었거든. 그리고 머리에 피가 났어.”

무니는 깜짝 놀라 데비에게 좀 더 다가갔다.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밀었다고?”

어떤 사람이 어떤 여자애를 밀었다고! 못 알아들은 거야?”

데비는 어느 새 칸타카 옆에 딱 붙어 서서 한심하다는 듯 무니를 쳐다봤다. 무니는 그런 데비의 표정은 무시하고 일단 수건에 물을 적셨다. 손과 얼굴에 묻은 피부터 닦고 볼 일이었다. 어떻게 비에 젖지도 않고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물어봤자 제대로 대답할 리도 없었다. 아무튼 지금 그 데비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쿨쿨 자는 중이었다. ‘속 편한 녀석이라니까.’ 데비는 누군가 그 소녀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는 분명 이 마을 사람이었다. 전체 주민을 불러놓고 자신이 본 사람이 누구인지 데비에게 고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 사람 역시 데비를 봤을 지도 모르니 어쩌면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인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 세 명은 차크라발라에서 낯선 존재였다. 가족처럼 똘똘 뭉쳐서 사는 마을 사람들이 데비의 말을 그대로 믿어줄 지 의문이 들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옷에 묻어 있는 피가 신경 쓰였다. 이방인이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 지는 남카네 마을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오히려 그들이 범인으로 몰릴 지도 몰랐다. 무니는 난다가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꽉 쥔 그의 손 안에는 진주 모양의 세 번째 검 조각이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