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꽃 피우니 법계가 무궁하고 창성하네!

행복을 찾아가는 절집기행6- 보림사

2011-08-17     임연태 논설위원/이승현 사진작가
▲ 보림사 내경

외호문에서 만나는 천년의 바람

길가에 한 발 비켜 선 일주문이 이채로웠다. 현판을 걸지 않은 그 문에서 한 참 들어 온 곳에 주차장이 있고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 라는 두 줄 쓰기 세로 현판이 걸린 외호문(外護門)이 있다.

그리 크지 않지만 외 5포의 웅장한 포집인 외호문은 단정한 모습으로 절의 찬란한 역사를 말해 주는 듯 했다. 문 안쪽 외호문이라는 현판 위에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라는 글자에 나팔수씨의 눈이 고정됐다.

“연혁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 온 가람이라 했고 이 문에는 선종대가람이라고 했으니 보림사와 선종의 관계는 특별한가봐?”

“여보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보림사는 구산선문의 원조도량이야. 좀 어려운 얘기니까, 천천히 얘기하도록 해.”

“모르면 모른다고 하셔.”

“…”

사천문(四天門) 안쪽에는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천왕들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인데 어정쩡하게 생겨먹은 생령들이 한쪽 다리를 떠받치고 있어 웃음이 났다. 양쪽 천왕들 앞에는 빨간 왕방울 귀걸이를 한 역사(力士)가 주먹을 쥐고 머리통을 쥐어박는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무섭지는 않다. 1515년에 나무로 조성한 보림사 사천왕은 보물 제1254호다.

“이분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연로하신 목조사천왕상이셔. 중간 중간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아, 1515년에 모셨다고 했으니까, 500살이 넘으셨네.”

전해지는 조선시대 목조사천왕상의 경우 1690년에 조성된 청도 적천사 사천왕상과 1702년의 남해 용문사, 1704년의 하동 쌍계사 사천왕상이 손꼽힌다.

 

아홉 산에 열린 아홉 도량의 수행가풍

보림사 경내를 들어서니 두 기의 3층 석탑과 석등이 대적광전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왼쪽에 대웅보전이 있고 그 뒤와 옆에 건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쌍3층 석탑은 석등과 함께 국보 제44호다. 높이는 서탑이 5.4m, 동탑이 5.9m로 약간 차이가 나는데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세워 진 것으로 전한다. 신라시대 탑으로는 보기 드물게 탑의 윗부분인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과 석등 그리고 대적광전 안의 철불이 같은 시기에 조성됐다고 하니까 모두 1100년이 넘은 유물들이지.”

“탑이 참 안정감 있고 멋있네. 위로 치솟는 지붕돌의 맵시가 예사롭지 않아.”

부부는 합장 3배를 하고 철제 경계선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탑을 한 바퀴 돌았다.

대적광전의 철조 비로자나 부처님은 암갈색의 몸체에서부터 강한 이미지였다. 국보 제117호이며 높이는 273.5m. 신라 858년 장사현 부수 김언경이 녹봉을 시주해 2500근의 철을 사서 조성 했다고 전한다. 보조체징 선사의 비문에는 860년에 조성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858년에 제작하기 시작해 860년에 완성한 것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월급을 떼어내 부처님을 조성하고 그 부처님이 1100년이 넘도록 후손들에게 공양을 받고 있으니 시간이라는 것은 정말 덧없는 것 같아. 시간 그 자체에 길고 짧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삼배를 마치고 부부는 법당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아까 구산선문 얘기 하다가 말았지? 우리나라 불교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 구산선문이야. 중국, 그러니까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거기서 달마로부터 이어지는 선불교의 법통을 이어 받은 스님들이 속속 귀국해 절을 세우는 일이 100여 년 동안 이어졌는데 그 기간 동안 9곳의 산을 중심으로 세워진 절이 모두 9곳이지. 그래서 구산선문이라고 하는 것이고. 지금 남한에 8곳이 있고 북한의 해주지역에 한 곳이 있어.”

▲ 신라시대에 조성된 철불

보림사를 중창한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 선사는 충남 공주출생으로 어릴 때 출가하여 염거(廉居; ?~844) 선사에게 인가를 받았다. 염거 선사는 도의(道義; ?~?) 선사의 제자다. 도의 선사는 서덕왕 5년(784)에 당나라로 구법유학을 떠나 대륙의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수행을 했다. 강서성 홍주 개원사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 선사를 찾아 법을 물었다. 지장 선사는 도의 선사를 보고 한 눈에 큰 그릇임을 알았고 “참으로 법을 전수할 만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는가”라며 법을 전했다.

도의 선사가 6조 혜능의 증손자뻘인 서당 지장에게서 선법을 배워 왔다는 것은 달마 이래로 중국대륙을 풍미한 선법의 적손이 되어서 귀국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 사회는 선불교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만만치 않았다. 도의 선사는 신라 사회가 선불교에 눈뜰 인연을 만나지 못했다고 보고 설악산 동쪽 진전사에 은거했다. 거기서 염거 화상에게 법을 전하고 염거 선사가 억성사 등을 중심으로 선법을 펴나갈 무렵 보조 체징 스님을 제자로 인가해 법통을 잇게 한 것이다.

도의 선사가 칩거하는 동안 826년에 귀국한 홍척(洪陟; ?~?)선사가 왕실의 협조를 받아 남원에 실상사를 개창하니, 가장 먼저 열리는 산문이 된다. 구산선문의 성립 시기는 산문의 개산조(開山祖)가 당에서 귀국하는 연대를 따져보면 비교적 정확하다.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도의 국사는 821년에 귀국하지만 40년간 칩거를 하고 그의 법손 체징 선사는 840년에 귀국했다. 실상산문을 연 홍척 선사는 826년에 귀국했고 봉림산문을 연 현욱(玄昱; 787~868) 선사는 837년에 귀국해 제자 심희(審希)가 창원에 봉림사를 세워 봉림산파를 이뤘다. 곡성 태안사 동리산문의 개산조 혜철(惠哲; 784~861) 선사는 839년부터 태안사에서 선지를 편 것으로 전해진다.

사자산문의 개산조 도윤(道允 800~868) 선사는 혜능의 법을 이은 남전보원(南泉普願)으로부터 인가 받고 귀국해 쌍봉사에 머물렀고 그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 831~895)이 지금의 법흥사인 흥령사를 세워 사자산문을 열었다. 성주산문을 연 무염(無染; 800~888) 선사는 도의 국사가 귀국하던 821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사굴산문의 법일(梵日; 810~889) 선사는 847년에 귀국했다. 수미산문의 이엄(利嚴; 870~936) 선사의 귀국은 911년이고 희양산문 개산조 긍양(兢讓; 878~956) 선사는 고려 태조 7년인 924년에 귀국했다.

“중요한 것은 산문은 아홉 곳으로 나눠졌지만 그 뿌리는 모두 6조 혜능 선사에게로 모아지므로 우리나라 선불교는 달마의 선불교를 이어받은 것이지.”

“그렇게 족보를 따지니까 무슨 무협지의 당파를 따지는 것 같다.”“그러니까 보림사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 보조 체징 선사의 부도와 탑비야.”

 

침묵으로 남은 가르침이 들리는가?

부부는 대적광전을 나와 곧바로 보물 제157호인 보초 체징 선사의 부도 창성탑(彰聖塔)과 보물 제158호인 탑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대웅보전과 지장전을 지나 파란 잔디가 덮인 언덕 위였다.

“창성탑이 탑의 이름인가?”

“왕이 하사한 탑 이름이야. 옛날에는 큰 스님이 입적하면 왕이 탑호를 하사하고 이름도 다시 내렸어. 시호(諡號)라고 하지. 보조라는 이름도 왕이 내린 시호야. 왕으로부터 탑호와 시호를 받을 정도면 거의 왕사나 국사급이라고 봐야지. 그런데 보림사는 체징 선사 입적 후 헌강왕이 선사의 시호와 탑호에다가 절 이름도 보림이라고 지어 줬어. 이 절이 선의 정통을 이은 곳임을 인증하는 의미에서지.”

근래에 세운 사적비가 있고 그 옆에 보물 제158호 창성탑비가 1100년의 세월을 견디고 서 있었다. 언덕 위쪽으로 20m가량 올라가 보물 제157호 창성탑 앞에서니 시간의 무상함을 더욱 절감할 수 있었다. 4.1m의 창성탑은 적당히 화려하고 적당히 단순했다. 부도의 뒤쪽에서서 보니 아침나절 비에 씻긴 보림사가 말쑥해 보였다. 창성탑 기왓골과 대웅보전 기왓골이 예와 오늘의 간격을 한 눈에 보여 줬다.

부부는 말없이 창성탑 주변을 서성거리다 대웅보전과 명부전을 참배했다. 명부전의 외벽에도 지옥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한 벽화가 가득 차 있었다. 그림 위쪽에 짧은 글이 적혀 있다.

 

이익 욕심 챙기기에 눈 먼 사람은

염라대왕 지옥열쇠를 풀고

맑은 행과 착한 생각 가진 사람은

아미타불 극락세계 영접을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