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 스님의 감춰진 불교이야기]33. 금강산과 법기보살신앙
2002-07-31
바다가운데 금강산 있으니
법기보살이 권속들과 함께
머물며 법을 설하느니라
금강산은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불가의 향내음이 깊이 스며 있는 도량이다.
그러나 6·25이후, 이 땅의 산과 들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사랑하던 한국불교는 법기보살의 상주설법도량으로 확인되고 신앙되어 온 금강산을 잃어버렸다. 지금 우리는 남과 북의 분단의 탓으로 법기보살, 즉 담무갈보살의 신앙을 까마득히 잊고 있지만 우리의 옛 선조들은 금강산이 바로 법기보살의 성지라는 믿음으로 그곳을 마음닦는 도량으로 삼아왔다. 그렇다면 법기보살은 어떤 보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신앙되어 왔는가. 법기보살(法起菩薩)의 범어 명칭은 다르모가타(Dharmogata)로서 담무갈(曇無竭)이라고 한역한다. 신역 <<화엄경>> 권45,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서는 ‘법기보살’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구역 <<화엄경>> 권29, <보살주처품>과 <소품반야바라밀다경>>권10의 <살타파륜품(薩陀波崙品)>과 <담무갈품(曇無竭品)>에서는 ‘담무갈’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금강산에 관한 옛 기록에서는 대부분 담무갈로 표기하고 있다. 신역(80권본) <<화엄경>> 권45,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 의하면 법기보살은 금강산에 상주설법하는 보살이라고 한다. 즉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으니 옛적부터 보살들이 그곳에 머물었으며 지금은 법기보살이 그의 권속 천이백 보살들과 함께 머물며 법을 설하느니라”라고 비교적 짧게 기술되고 있다. 이처럼 <화엄경>을 통해서 우리의 도량, 금강산에 주석하는 보살로 수용된 법기보살 신앙은 우리나라 불교에 매우 큰 진폭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옛 불교도들은 금강산은 곧 법기보살의 상주처라는 토착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불교 승가만큼 이 땅을 구석구석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서 옛 절집에서는 “북방 묘향산(妙香山), 남방 지리산(智異山), 서방 구월산(九月山), 동방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이라고 간단히 정리하고 산마다 나름의 기(氣)가 흐르고 수도의 방편이 다르다는 것을 세밀하게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의 평장사(平章事), 민지(閔漬, 1248~1326)는 그가 편찬한 <금강산유점사사적기>에서 “신라의 옛 기록에 의하면 의상법사께서 처음 오대산에 드셨다가 금강산에 드시자 담무갈보살이 현신하여 법사께 ‘오대산은 수행이 있는 사람들만 세간의 티끌을 벗어날 수 있는 땅이지만 이 산은 수행이 없는 무수한 사람들도 세간의 티끌을 벗어날 수 있는 땅이다’라고 이르셨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준엄하고 엄숙한 자장율사의 오대산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금강산의 여러 사암에서는 법기보살의 좌상, 입상을 봉안하고 있었다. 우선 금강산의 여러 사암의 연혁과 금석문, 시가, 성보(聖寶), 토지등의 자료를 집대성하고 있는 <금강대본산유점사본말사지(金剛大本山楡岾寺本末寺誌, 1942년 유점사 종무소 간행. 전886쪽)>만을 자료로 한정하여 살펴 보더라도 법기보살 신앙은 금강산 일대의 여러 사암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료의 성보대장에 수록된 바에 의하면 법기보살 좌상과 입상 봉안 사례는 고려 강종(康宗) 2년(1213) 4월 형잠(瑩岑)스님이 조성한 유점사의 ‘법기보살좌상’과 익잠(益岑)스님이 조성한 표훈사의 목제도금 ‘법기보살입상’, 또 건륭(乾隆) 3년(1738) 함월해원(涵月海源)스님이 찬한 <금강산표훈사사성전담무갈보살소상신조기(金剛山表訓寺四聖殿曇無竭菩薩肖像新造記)>, 강희(康熙) 6년(1667) 4월 유성(宥成)스님이 조성한 신계사 미륵암의 목제도금 법기보살 좌상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품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자신을 팔아 진리를 구하는 법기보살의 구도담을 수록하고 있다. 이와같은 구도담은 우리의 옛 스님들과 신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법기보살, 즉 담무갈보살이 상주설법하는 금강산에 대한 자부심을 한층 높여 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경학회 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