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일여’ 선풍 내보인 ‘자비섭화’ 화신

법계출가 정신 담은 시편 통해 
한국 선시 현대화·발전 앞장
신흥사·백담사 등에 선원 개원
‘설악산문’ 복원…전법당간 세워
“불교, 깨달음 실천 종교” 강조

설악 무산 대종사(1932~2018)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밀양 성천사로 동진출가, 인월 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젊은 시절 금오산 토굴에서 6년 동안 고행했으며 설악산 신흥사에서 정호당 성준 화상을 법사로 건당했다. 이후 신흥사 조실이 되어 설악산문을 재건했으며, 조계종 기본 선원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저술로는 〈벽암록 역해〉 〈무문관 역해〉 〈백유경 禪解-죽는 법을 모르는데 사는 법 을 어찌 알랴〉 〈선문선답〉 등이 있다. 일찍이 시조시인으로 등단한 스님은 한글 선시조를 개척해 현대 한국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시집으로 〈심우도〉 〈절간이야기〉 〈아득한 성자〉 〈적멸을 위하여〉 등이 있다.또한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해 만해대상, 만해축전을 개최하고 만해마을을 조성해 동국대에 기부하는 등 포교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이 같은 공로가 인정돼 국민훈장 동백장과 은관문화훈장, 조계종 포교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DMZ평화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설악 무산 대종사(1932~2018)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밀양 성천사로 동진출가, 인월 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젊은 시절 금오산 토굴에서 6년 동안 고행했으며 설악산 신흥사에서 정호당 성준 화상을 법사로 건당했다. 이후 신흥사 조실이 되어 설악산문을 재건했으며, 조계종 기본 선원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다. 저술로는 〈벽암록 역해〉 〈무문관 역해〉 〈백유경 禪解-죽는 법을 모르는데 사는 법 을 어찌 알랴〉 〈선문선답〉 등이 있다. 일찍이 시조시인으로 등단한 스님은 한글 선시조를 개척해 현대 한국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시집으로 〈심우도〉 〈절간이야기〉 〈아득한 성자〉 〈적멸을 위하여〉 등이 있다.또한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해 만해대상, 만해축전을 개최하고 만해마을을 조성해 동국대에 기부하는 등 포교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이 같은 공로가 인정돼 국민훈장 동백장과 은관문화훈장, 조계종 포교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DMZ평화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8년 5월 26일, 설악이 산주(山主)를 잃었다. 설악산문을 복원해 전법당간을 세우고 한국 선시의 현대화에 앞장섰던 설악 무산 대종사가 원적에 들어서다. 대종사는 격외의 증도가를 대중에게 내보인 선사이자 선취가 담긴 시조로 한국 문단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무산 대종사 열반 5주기를 맞아 후학 문인인 유응오 소설가가 본지에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이에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설악 무산 대종사는 휘(諱)인 무산(霧山)이나 법호인 설악(雪嶽)보다 속명인 오현(五絃)으로 더 많이 불렸다. 대종사께서는 세간(世間) 너머 출세간(出世間), 출세간 너머 출출세간(出出世間)의 길을 걸으며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삶을 살다가셨다. 

대종사는 1932년 경남 밀양시 상남면 이현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대종사는 성격이 온아하고 영특한 법기(法器)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도반인 정휴 대종사가 쓴 비명(碑銘)에 따르면 “스님은 밀양 성천사 인월(印月) 화상을 은사로 모시고 동진 출가한 뒤 장교(藏敎)를 읽고 두타정진(頭陀精進)하여 대지(大智)를 터득하였다”고 명시돼 있다. 

대종사는 끊임없이 만행의 길을 떠났다. 당시는 6·25 전쟁 직후여서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종사도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다가 경북 영천의 한 마을에 다다르게 되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보여서 대문을 밀고 들어가 1시간 동안 독경을 했다. 하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대종사는 오기가 생겨서 더욱 목청을 높여 독경을 이어나갔다. 때마침 얼굴이 일그러진 문둥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오래지 않아서 주인이 쌀을 들고 나타났다. 그런데 주인이 주는 쌀의 양이 달랐다. 문둥이에게는 한 됫박이나 주면서 대종사에게는 간장 종지만큼 줬던 것이다. 그 순간 대종사는 깨달았다. 

‘문둥이가 삼계도사이자 법왕의 제자인 나보다 낫구나.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보다도 문둥이를 무서워하는구나.’ 

집을 나온 대종사는 무작정 문둥이의 뒤를 따라갔다. 문둥이가 도착한 곳은 다리 밑의 움막이었다. 문둥이 아내가 남편을 반겼다. 낯선 스님을 보자 문둥이 아내는 경계의 눈빛을 건네더니 잠시 뒤 스스럼없이 대종사에게 움막의 자리를 내주었다. 대종사는 그해 겨울 문둥이 부부의 움막에서 지냈다. 이듬해 봄 문둥이 부부는 편지만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스님은 다시 절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 성불하십시오.”

스님은 편지를 들고서 문둥이 부부를 찾아다니다가 이런 발심을 하게 되었다.
‘문둥이 부부처럼 병들고 헐벗은 사람들까지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크나큰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도 6년 수도 끝에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지 않았는가? 대장부로 태어나서 나라고 못할 게 뭐냐.’

불조(佛祖)가 부촉(咐囑)한 심인(心印)을 얻기 위해 스님은 삼랑진 금무산으로 들어가 토굴을 짓고 불철주야 정신한 끝에 생사의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전신지기(轉身之機)를 이루었다. 이 무렵 대종사는 평생 도반인 정휴 대종사를 만났다. 정휴 대종사의 소개로 영허당(暎虛堂) 녹원(綠園) 대종사와 법연을 맺고 김천 계림사, 구미 해운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당시 스님은 정완영 시인이 운영하는 양지다방에서 이호우, 이영도, 김상옥, 박재삼 시인과 교류하기도 했다. 

1975년 봄 설악산에서 정호당(晶浩堂) 성준(聲準) 화상을 친견하고 초종월격(超宗越格)의 법거량으로 입실건당한 뒤 용성(龍城), 고암(古庵), 성준(聲準)으로 면면히 계승돼온 법맥을 이었다. 성준 화상이 물은 것은 “달마는 왜 수염이 없는가”라는 화두였고, 스님이 성준 화상에게 내놓은 대답이 ‘달마십면목’이라는 시편이다. 이 시편은 1975년 〈현대시학〉에 발표됐다.  

매일 쓰다듬어도 수염은 자라지 않고
하늘은 너무 맑아 염색을 하고 있네
한 소식 달빛을 잡은 손발톱은 다 물러 빠지고
- 무산 대종사 ‘달마 5’

이후 무산 대종사는 신흥사 주지로 취임해 만나는 사람마다 근기에 맞게 자애를 보여 안심입명(安心立命)에 이르게 하였다.

수미산처럼 높고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대종사의 공적 중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무산 대종사는 백담사에 무문관인 무금선원과 조계종 기본선원을, 신흥사에 향성선원을, 흥천사에 삼각선원을 개원했을 뿐만 아니라 4년간 백담사 무문관에서 직접 폐관 정진하기도 했다. 이처럼 납자들의 수행처를 마련함으로써 종지종풍을 드날렸음은 물론이고 돈오뇌성(頓悟雷聲)의 선지(禪旨)를 보여주었다. 

또한 대종사는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하고 만해축전을 개최해 전 세계인의 축제로 승화시켰고,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창간한 〈유심〉을 복간해 불교문학의 당간을 세웠다. 무산 대종사는 자신의 공덕을 드러내는 경우가 없었다. 이는 ‘선행은 안 보이게 하고, 행동은 은밀하게 하라. 어리석고 둔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해라’라는 중국 동산 스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무엇보다도 대종사가 남긴 시편들은 일언일구(一言一句)도 버릴 데가 없는 선불교의 정수를 담고 있다. 

대종사가 양양 낙산사에서 정진 끝에 법신(法身)이 삼라만상 가운데 현현(顯現)하고 있음을 깨닫고 읊은 게송은 아래와 같다.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 홀로 듣노라면
천경만론(千經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 무산 대종사 오도송 ‘파도’

스님은 ‘심우도(尋牛圖)’, ‘아득한 성자’ 등 심원하고도 수려한 주옥같은 시편들을 남겼다. 이는 스님이 법계출가를 이룬 참된 수행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넓은 마음을 지녔기에 스님은 곧잘 〈육조단경〉의 한 구절인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을 역설하였다.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 등 모든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설 때야 비로소 법계 출가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산 대종사가 베푼 자비섭화(慈悲攝化)는 출세간을 가리지 않았던 터라 그 덕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사람이 스님에게서 지척의 자로는 잴 수 없는 대방무외(大方無外)한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대종사는 여러 시편에 자신을 한낱 미물에 비유했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 무산 대종사 ‘적멸을 위하여’


무산 대종사의 안목으로는 가장 짧은 시간인 찰나가 가장 긴 시간인 영겁으로, 가장 낮은 존재인 미물이 가장 높은 존재인 성자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종사는 “중생의 삶이 바로 팔면대장경이고 부처고 선지식”이라고 일갈하면서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는 선지식의 행태를 꼬집기도 했다. 

“‘본래면목’이나 ‘뜰 앞의 잣나무’ 같은 화두는 천년 전 중국 선사들의 산중문답입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습니다. 부처는 중생과 고통을 같이 해야 합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대종사는 입적을 앞두고 고향집을 찾았다. 폐가가 된 고향집에서 대종사는 한 바탕 울고 웃은 뒤 주석처로 돌아와 시자를 불러 아래와 같은 임종게를 남겼다.

천방지축 기고만장 허장성세로 살다 보니 
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았구나
억!

스님이 남긴 마지막 문장 부호는 마침표도 아니고 쉼표도 아니고 말줄임표도 아닌 느낌표였다. 평생을 깨달음을 실천하면서 살다간 도반의 열반에 정휴 대종사는 아래와 같이 찬하였다. 

한번 할(喝)을 하니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무너지고
한번 발길질에 비로(毘盧)의 바다가 뒤집혔다
손끝으로 우주(宇宙)를 자유롭게 부리고
입으로 백억화신(百億化身)을 토하니
이것이 무산(霧山)의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선풍(禪風)이로다

몇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산주(山主)를 잃은 설악산은 슬픔에 잠겨 있다. 자욱한 운무(雲霧)에 휩싸인 설악산은 살아생전 대종사의 진영(眞影)일 것이다. 지평선 끝까지 내려다보이는 천야만야(千耶萬耶)한 준령(峻嶺)의 정상(頂上)인가 싶다가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연기 자욱한 소산(燒山)의 영대(靈臺)인 게 스님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이었으니….  

대종사의 두 눈은 때로는 탁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당최 알 수 없었고, 때로는 원체 맑고 투명해서 그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맑든 탁하든 스님의 두 눈에 깃든 여울목은 참으로 깊어서 그 수심(水深)을 감히 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유응오 소설가
유응오 소설가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 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 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 무산 대종사 ‘무자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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