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북종선(北宗禪)의 창립자, 신수(神秀)

측천무후 초청으로 제도에 입성
46세 때 홍인 문하서 6년 수학
‘오방편문’, 도신 ‘오문선요’ 유사
핵심사상 일심이문·본각과 시각

도신(道信)이 황매(黃梅)의 쌍봉산에 도량을 개설하고, 홍인(弘忍)이 그를 계승한 동산법문(東山法門)은 당시 불교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천하의 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운집하였다. 전적에 따라 다르지만, 도신 문하에 5백 혹은 7백 명, 홍인 문하에 1천 2백 명의 승려들이 운집하여 수행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불교사에서도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산법문이 이름을 떨치자 홍인의 제자들도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최초로 황제의 주목을 이끈 이가 바로 신수(神秀, 606~706)이다. 당시 당조(唐朝)는 개국 76년 만에 중대한 변국(變局)을 맞았는데, 그것은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에 의하여 국호가 주(周)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록 측천무후 사후에 다시 ‘대당(大唐)’의 국호를 회복하였지만, 한차례 국성(國姓)이 바뀐 치욕을 겪었다고 하겠다.

측천무후는 태종(太宗)을 모시던 궁녀였기 때문에 태종의 사후 당시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에 출가하였던 경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 때문인지 황제에 즉위하기 위하여 <대운경(大雲經)>이라는 위경(僞經)을 이용한 것은 불교사에 유명하다. 황제에 즉위한 이후 도교를 중시한 당조와의 차별을 두기 위한 까닭인지 불교의 고승들을 궁전으로 초청하여 법문을 듣는 등 불교를 도교보다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때 동산법문 출신인 신수가 측천무후의 초청을 받아 제도(帝都)에 입성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삼제(三帝)의 귀의를 받았기 때문에 후대에 “양경(兩京: 長安과 洛陽)의 법주(法主), 삼제의 국사(國師)”라고 칭해진다. 사실상 동산법문은 신수와 그의 제자인 보적(普寂)이 제도인 장안과 낙양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더욱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홍인의 사상을 계승하여 북종선(北宗禪)을 건립한 대통 신수(大通神秀)의 생애와 선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신수의 전기는 <송고승전>, <경덕전등록> 등 후대에 찬술된 많은 승전에 실려 있지만, 북종선이 단절되어 간략하게 되어 있고, 비교적 상세한 전기는 같은 홍인의 제자인 현색이 찬술한 <능가사자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료는 신수에게 귀의한 장열(張說, 667~730)이 선사의 입적 후 작성한 <대통선사비명(大通禪師碑銘)>이며, 이는 <전당문(全唐文)> 권231, <융흥불교편년통론> 권14, <불조역대통재> 권12 등에 온전하게 실려 있다. 따라서 그를 중심으로 신수의 생애와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통선사비명>에 따르면, 신수는 속성은 이(李)씨이고, 변주(神州) 위씨(尉氏: 현 河南省 尉氏縣) 출신이라고 한다. 신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제생(諸生)이 되어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현묘한 취지와 <서경(書經)>, <주역(周易)>의 핵심을 파악하였고, 삼승경론(三乘經論)과 <사분율(四分律)> 등에 정통하였다.”라고 한다. 따라서 신수는 출가 전부터 유불도 삼교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불교의 경율론에도 해박했음을 알 수 있다. 신수의 출가에 대해서 20세인 무덕(武德) 8년(625) 낙양(洛陽)의 천궁사(天宮寺)에서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하겠다.

신수는 46세인 영휘(永徽) 2년(651)에 홍인의 동산법문 문하로 들어가 6년 동안 밤낮으로 정진하였기 때문에 홍인으로부터 “동산의 법은 모두 신수에게 있구나!”라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수는 홍인 문하를 떠나는데, <대통선사비명>에서는 “그리하여 눈물을 흘리며 물러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은거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갑자기 홍인의 문하를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신수가 국가의 승록(僧錄)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던 사도(私度)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중국은 수조(隋朝)로부터 승려들의 승적(僧籍)을 철저하게 관리하였고, 스스로 출가하는 이른바 ‘사도’를 금했는데, 이를 위반하면 사형까지도 받는 중죄로 규정하였다. 이는 당조(唐朝)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 역사에서 시행된 국가의 불교 정책이라 하겠다. 사실상 신수뿐만 아니라 혜능(慧能)도 홍인의 문하를 홀연히 떠난 이유가 ‘사도’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신수나 혜능이 홍인 문하를 떠난 후에 은거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도신도 처음엔 ‘사도’였기 때문에 동산법문에서는 ‘사도’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도승’을 받아들이면 사찰도 관방의 처벌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통선사비명>에서는 신수의 은둔했던 과정은 생략하고, 의봉(儀鳳) 연간(676~679)에 형초(荊楚: 현 湖北省)의 당양(當陽) 옥천사(玉泉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비로소 국가의 ‘승록’에 등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연유인지 이 시기에 앞에서 언급한 20세에 천궁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것으로 소급하여 등록되었다고 하겠다. 더욱이 당시 당양의 대중들이 옥천사의 주지로 추대하였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신수의 명성이 널리 퍼졌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신수는 옥천사 동쪽으로 7리(七里) 떨어진 곳에 뛰어난 경관을 보고, “이곳은 바른 능가(楞伽)의 고봉(孤峰)이며, 도문(度門)의 난야(蘭若; 사찰)이니, 그늘진 소나무 아래 풀을 깔고 앉아, 나는 늙어가는구나.”라고 하였다. 따라서 신수는 옥천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찰을 세워 주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통선사비명>에서는 “이로부터 신수에게 배우러 온 이들이 넘쳐 마치 도시와 같았으며, 당(堂)에 오른 이가 70명이고, 도(道)를 맛본 이들이 3천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624년 도신에 의하여 창건된 호북성 황매현 소재 사조정각선사.
624년 도신에 의하여 창건된 호북성 황매현 소재 사조정각선사.

구시년(久視年, 700) 측천무후가 신수를 궁으로 불러 법문을 들었으며, 이때부터 신수는 성가(聖駕)를 타고 낙양과 장안의 양경을 왕래하였다. 이후 측천무후가 죽자 옥천사로 돌아갈 것을 청했지만, 오히려 중종(中宗)은 그에게 전국의 승가를 통섭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신수는 제자인 보적(普寂)에게 양보하였다. 다음 해인 신룡(神龍) 2년(706) 2월 28일에 낙양 천궁사에서 101세의 나이로 입적하였고, 중종은 ‘대통선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능가사자기>에서는 “굴(屈)·곡(曲)·직(直)”의 세 글자를 유촉하였다고 한다. 여러 정황상 ‘사도’로 46세에 홍인 문하에 들어가 6년 동안 수학했지만, 홀연히 도망갈 수밖에 없었고, 후에 옥천사에서 비로소 승적에 등재되어 제자들을 교계(敎誡)하면서 생을 마치고 싶었지만, 측천무후의 칙명에 제도로 들어가 ‘삼제의 국사’라는 영예를 얻어 낙양에서 101세로 입적한 모든 회한을 “굴·곡·직”에 담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신수의 사상은 어떠한가? 돈황의 자료로부터 신수의 저술로 확인된 <대승무생방편문(大乘無生方便門)>에서 그의 선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대승무생방편문>의 첫머리에 ‘오방편문(五方便門)’으로 “제1 불체를 모두 드러내어 밝힘[第一總彰佛體], 제2 지혜문을 엶[第二開智慧門], 제3 부사의법을 현시함[第三顯示不思議法], 제4 제법의 정성을 밝힘[第四明諸法正性], 제5 자연무애해탈도[第五自然無碍解脫道]”를 열거한다. 이는 일견에 동산법문을 창립한 도신의 ‘오문선요(五門禪要: 知心體·知心用·常覺不停·常觀身空寂·守一不移)’와 상당히 유사한 구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명확하게 홍인으로부터 도신의 선사상을 수습했음을 여실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수의 ‘오방편문’은 도신과는 다르게 상당히 광범위하게 논해진다. 예컨대 ‘제1 총창불체’는 <대승기신론>, ‘제2 개지혜문’은 <법화경>, ‘제3 현시부사의법’은 <유마경>, ‘제4 명제법정성’는 <사익경(思益經)>, ‘제5 자연무애해탈도’는 <화엄경>을 전거(典據)로 사용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수는 당시에 유행하던 중요한 경전을 모두 운용하여 종합적인 불교의 수행체계를 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수의 사상적 핵심은 바로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과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승무생방편문>에는 “각(覺)의 뜻이란 심체(心體)가 생각을 떠남[離念]이요, ‘이념’은 불(佛)의 뜻이고, ‘각’의 뜻이다.”, “법계(法界)는 하나의 상(相)으로, 바로 여래의 평등법신(平等法身)이다. 이 법신의 명칭이 본각(本覺)이다.”, “간심(看心)하여 만약 청정하다면, 정심지(淨心地)라고 한다.”라는 구절들이 보인다. 이를 정리하자면, ‘심체’를 <대승기신론>의 ‘심진여문(心眞如門)’의 입장에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으로 설정하고, 그에 도달하려는 수행을 모든 객진번뇌를 떠난 ‘이념(離念)’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그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간심간정(看心看淨)’할 것을 제시한다. 엄밀하게 논한다면 신수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에 이르는 중국불교의 종합이라고 평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홍인의 제자이면서 남종선(南宗禪)을 창립한 혜능의 사상에 비추어 본다면, 신수의 사상은 ‘체용일여(體用一如)’에 미치지 못하고, 특히 혜능이 강조한 ‘돈오(頓悟)’의 입장에서는 ‘정망(淨妄)’과 ‘정박(淨縛)’에 떨어진 미진한 사상이라 하겠다. 이러한 입장에서 <육조단경>에서는 신수와 혜능의 게송으로 대비하고 있지만, 신수와 혜능은 결코 만난 적이 없다. 신수가 홍인 문하를 떠난 지 4년 이후에야 혜능이 홍인의 문하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조단경>에서 “신수의 몸은 보리수이고, 마음은 명경대와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는 게송은 비록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북종선의 사상을 명료하게 드러낸다고 하겠다.

비록 후대에 남종선에게 밀려 그 명맥이 단절되었지만, 신수의 공로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모든 권력이 황제에 집중된 전제국가에서 예종(睿宗), 측천무후, 중종의 삼제로부터 귀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동산법문이 불교의 주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했다고 하겠다. 더욱이 비록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조정 고관들이 신수에게 귀의하였고, 그의 제자 보적은 승가를 통섭할 지위를 얻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선종의 성립에 신수의 작용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한줄 요약

신수는 홍인으로부터 도신의 선사상을 수습했으며, 모든 경전 운용으로 종합적 불교 수행체계를 제시했고, 예종, 측천무후, 중종의 삼제로부터 귀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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