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선지식들 호랑이로 지칭
가장 무섭지만 친근한 존재로
특유의 위엄 용맹성에 신격화
불법 수호하는 동물로도 인식
​​​​​​​사찰의 창건설화 단골로 등장

2022년은 검은 호랑이의 해, 임인년(壬寅年)이다. 십이지의 호랑이는 방위상으로는 동북 방향, 시간상 오전 3시에서 5시, 달로는 음력 1월을 지키는 신이다.

호랑이는 한국인에게 공포의 상징인 동시에 가장 친숙한 동물이다. 조상들은 호랑이로 인한 재앙, 호환을 특히 두려워한 조상들은 오히려 호랑이에게 잡귀를 물리치는 영물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제를 지내기도 했다. 영물인 호랑이는 액을 물리고 복을 부르는 존재였으며, 때문에 매년 정초가 되면 궁궐을 비롯해 민가에서는 대문에 호랑이 그림을 붙이기도 했다. 각종 민화와 전설·구전설화에 호랑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와 청나라 등에서는 호랑이 이야기로 가득한 조선을 ‘호담국(虎談國)’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불교에서 호랑이는 영물인 동시에 그 특유의 위엄과 용맹성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로서 인식됐다. 대승보살이자 협시보살 중 하나인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동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문수보살이 중생들에게 화현해 지혜를 전하는 현장에 등장하곤 한다. 

당대의 선지식을 호랑이로 지칭하는 것도 이 같은 인식을 대변한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던 성철 스님과 가지산 호랑이 인홍 스님, 오대산 호랑이 탄허 스님, 조계산 호랑이 활안 스님 등이 대표적이다. 산 중 사찰서 용맹정진한 끝에 확철대오한 선지식들이 치열한 수행력과 기라성 같은 깨달음의 일성으로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모습에서, 각 산을 대표하는 호랑이로 연관시킨 셈이다. 

불자들에게는 사찰 산신각에 봉안된 탱화 속 산신과 함께하는 호랑이의 모습도 상당히 익숙하다. 산신은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신이지만 불교와 습합된 한국불교의 독특한 신앙형태다. 산신도를 통해 영물인 호랑이가 산신의 옆에 엎드리거나 뒤따르는 등의 모습으로 신격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천 용문사와 문경 김용사의 산신도 속 산신 앞에 엎드린 의젓한 모습의 호랑이가 대표적이며, 서울 화계사 명부전과 수원 팔달사 용화전 벽면에 그려진 호랑이는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각종 설화 속에서도 호랑이는 단골소재로 등장한다. 부처님의 전생담에서 나타난 호랑이는 살생을 하는 천성으로 보살행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굶어죽어가는 호랑이 가족을 만나 스스로 몸을 보시했다는 내용이다. 호랑이에게 먹히는 가장 끔찍하고 두려운 형태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서 보살행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사찰의 창건설화 속 호랑이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나주 불회사 창선설화 속 호랑이는 과거 조상들이 가장 사랑했던 ‘은혜 갚는 호랑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들어선 시기, 참의 벼슬을 지낸 조한용이란 충신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출가해 오랜 세월에 쇠락한 불회사를 복원하고자 원을 세웠다. 어느 날 저녁, 절로 돌아오던 중 산길에서 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호랑이 한 마리를 만났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목에 비녀가 걸려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었음을 눈치챈 스님은 호랑이에게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비녀를 제거해 호랑이를 구했다. 

이후에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꾸준히 불사에 매진하던 스님은 어느 날 귀한 집 소생으로 보이는 처자가 절 마당에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호랑이가 한 짓임을 알고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수소문한 결과, 천 리 밖 안동 만석꾼의 외동딸임을 확인했다. 스님은 즉시 처녀를 안동의 집으로 데려다 줬고, 호환으로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이 돌아온 것에 크게 감동한 아버지인 김상공이 불회사 복원 불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불회사 중창불사가 원만히 회향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함께 영주 희방사에도 같은 내용의 창건설화가 두운대사와의 인연담으로 전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경주 호원사 창건설화는 〈삼국유사_감통편〉의 ‘논호림(論虎林)’이라는 제목으로 전한다. 김현(金現)이 흥륜사(興輪寺)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만난 호랑이 처녀의 인연을 기록한 글로, 당시 세 오빠가 저지른 살생의 업보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호랑이 처녀가, 김현에게 이를 이용해 벼슬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내용이다. 훗난 김현은 호랑이 처녀의 넋을 기리는 절 ‘호원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호원사는 현재 경주 황성숲 인근 사지로만 남아있다. 

호랑이는 반야사 창건 설화에도 등장한다. 반야사 중창을 명한 세조가 대웅전에 참배하자 문수동자가 나타나 절 뒤쪽에 있는 개천(현재의 영천)에서 목욕을 권했다. 세조가 목욕을 시작하자 문수동자는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 때 문수동자가 타고 온 호랑이가 아직도 백화산에 남아 반야사를 지키고 있다고 전한다.

서울 호압사가 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지어졌다는 설화는 유명하다. 조선왕조 개국 후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이전키 위해 경복궁을 중창했다. 그러나 공사는 원만하지 않았다. 틀을 세우는 족족 무너져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어느날 태조의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호암산 호랑이 기운의 꼬리부분에 절을 세운다면 궁궐이 무사히 축조되고 왕조의 기운도 성성하게 뻗어 나갈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때 노인이 알려준 호랑이 기운의 꼬리부분이 바로 지금의 호압사가 위치한 곳이다. 이후 무학대사가 “달아나는 호랑이 형세를 막아야 한다”고 조언해 지어진 곳이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사자암이라는 설화도 함께 전해진다.  

송지희 기자 jh35@hyunbul.com

호랑이해 불교 소사

△631 원광 스님 입적
△702 의상 스님 입적
△918 처음으로 입관회 설치 
△1422 경행행사 폐지 
△1410 해인사에 대장경 인행 명령 
△1458 해인사 대장경 인쇄해 사찰 분배 
△1902 사찰령 36조 공포, 식민지 불교시대 시작
△1926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간행
△1938 김제 금산사 낙성식, 〈불심〉창간
△1950 국보 청평사 화재로 소실 
△1962 불교재산관리법 제정 공포
△1974 조계종 전국승려대표자회의 개최, 조계종 종정 고암 스님 사퇴, 5대 종정 서옹 스님 취임, 월간 〈불광〉, 월간 「불교문화」 창간 
△1986 전국승려대회 개최, 불교탄압공동대책위원회 결성 
△1998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 황해북도 사리원 금강국수공장 준공, 대한불교종단총연합회 창립, 정화개혁회의 발족, 조계종 제29대 총무원장에 고산 스님 당선
△2010 ‘무소유’ 법정 스님 입적, 문수 스님 소신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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