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한뿌리… ‘공생의 삶’ 울림 남아

월주 대종사가 상좌인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과 2013년 11월 생명의 우물 2000기 완공식에 참석해 현지 어린이에게 물을 건네는 모습.
월주 대종사가 상좌인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과 2013년 11월 생명의 우물 2000기 완공식에 참석해 현지 어린이에게 물을 건네는 모습.

시민운동, 종교화합으로 이어지다

종교화합 l 태공 월주 대종사는 ‘깨달음의 사회화’를 기치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동했다. 월주 대종사의 사회운동은 1988년 6월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으면서 본격화 됐다.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와 김지길 목사와 함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로 당시 촉발된 지역감정 극복을 위한 것이었고, 민주화의 열망도 함께 반영됐다.

경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 1989년 월주 대종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황인철 변호사 등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공동대표로 취임했고 8년간 대표로 임했다.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월주 대종사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 상임대표(1990~1995),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1996~2006),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공동위원장(1998~2003) 등을 맡으며 다양한 사회 문제에 귀를 기울였다.

이러한 활동은 불교계로도 이어져 불교도 시민운동연합,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불교인권위원회 결성 등으로 이어졌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쉼터인 ‘나눔의집’ 건립으로 이어진다.
사회운동 과정에서 이웃종교인들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종교간 화합의 바탕이 됐다. 1996년 월주 대종사는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를 창립해 2년간 공동대표의장 겸 이사장을 지냈다. 

특히 월주 대종사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있었던 1997년 말 IMF 사태는 종교가 국민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월주 대종사는 평소 교분이 있었던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와 함께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고,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게 된다. 1998년 전경련, 교총, 변협 등 18개 민간단체가 참여한 민간 주도 최대 실업대책기구인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서 월주 대종사는 공동위원장을 맡고 일자리 대책을 수립했다. 당시 435개 사업을 전개해 230만 명에게 직간접 혜택을 주었고, 이 본부는 함께일하는재단으로 바뀌어 430만 명에게 동체대비사상을 실천했다.

종교인이 힘을 모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대종사의 가르침이 울림으로 전해진다.

5.18 아픔 함께한 시민의 아버지

민주화 운동 l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월주 대종사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후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월주 대종사의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에 따르면 총무원장 취임 20여 일만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계엄이 재갈을 물린 언론은 불순세력의 폭동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월주 스님은 광주로 가기로 결심하고 5월 24일 선발대 격으로 ‘소요사태 진상조사 선무단’을 보냈다. 
전두환 신군부의 철권통치가 이뤄지는 시기에 월주 스님의 이 같은 행동은 정권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소식을 들은 종로경찰서장은 월주 대종사를 찾아와 “위에서 가지 말라고 했다”며 광주행을 막았다. 

하지만 월주 대종사는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도리어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시민 희생자와 군인 등 모두를 위로하기 위해 가겠다”면서 광주행을 강행했다. 

월주 대종사는 5월 30일 광주시민을 지원하기 위한 ‘광주시민돕기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사상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광주시민을 돕는 데 앞장서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또한, 전국 본말사와 신행단체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의연금 모금을 진행하기도 했다.  

조계종의 광주 방문은 6월 3일 이뤄졌다. 월주 대종사를 비롯한 6명의 광주 방문 조계종 대표단은 서울에서 전남 장성으로 기차로 내려간 뒤 다시 차량으로 광주에 갔다. 종교계 중앙 교단 책임자로서는 첫 방문이었다.

불교계는 이날 오전 11시 관음사에서 ‘광주 사태 희생자 영가’라는 위패를 모시고 천도재 입재를 봉행했으며, 이후 정시채 전남도 부지사를 찾아가 “사태 수습과 위로금으로 사용하라”며 금일봉을 전달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5개월이 지나고 ‘10.27법난’이라는 1700년 한국불교 역사상 최악의 법난이 벌어진다. 월주 대종사도 당시 연행돼 23일 간의 불법 수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고, 총무원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월주 대종사는 회고록에 훗날 ‘권력이 내민 손을 잡았다면 법난이 열리지 않았을까’라고 수  차례 자문했지만 자신의 답은 ‘아니다’였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광주행을 후회하지 않음을 이 같이 밝혔다. “1980년 외로운 광주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불교, 나아가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소외된 위안부 문제 수면위로 올려

위안부 피해치유 l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안식처인 나눔의집은 우리사회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불교계 원력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첫 시작은 1992년 6월 ‘나눔의집건립추진위원회’ 출범이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인식은 무관심과 편견으로 점철돼 있었다. 사회적 관심이 저조한 까닭에 할머니들의 처우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불교인권위원장이었던 월주 대종사는 나눔의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모금활동을 주도했다. 종단 차원의 ‘깨달음의 사회화 기금’을 비롯해 종단 예비비를 더해 1992년 10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나눔의집을 개원했다. 덕분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할머니들을 안정된 주거공간에 모실 수 있게 됐다.

월주 대종사는 나눔의집과 이곳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쏟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편안한 여생을 위해 1995년 12월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소재 부지에 나눔의집을 이전했다. 정부 지원금 없이 운영되던 상황에서 재정은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운영상 어려움에 고충을 겪던 나눔의집이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데에는, 월주 대종사의 관심과 이로 인해 모인 불교계 후원이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나눔의집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었다. 할머니들의 기억을 기록화하고 각계 인사, 관련 단체들과 연대했다. 이를 토대로 진상규명을 통한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국제적으로 위안부 문제의 실태를 알렸고 일본을 향해 과거사 참회를 촉구했다.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개관한 것도 그 일환이다. 

월주 대종사는 생전 회고록에서 나눔의집을 꾸준하게 운영하는 이유에 대해, “이 깊은 마음으로 티끌같은 많은 중생을 받들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 은혜를 갚은 것”이란 〈화엄경〉의 경구를 인용했다. 지난해 나눔의집 사태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월주 대종사의 남다른 원력과 그간의 공적마저 흔들리는 아픔이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적지 않다. 

세계일화정신, 불교해외구호 문열다

해외구호 l  월주 대종사의 ‘깨달음의 사회화’는 국내에서만 발현된 것이 아니었다. 월주 대종사는 2003년 10월 국제구호단체(NGO)인 지구촌공생회를 창립했다. 한끼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지구촌 현실에서 월주 대종사의 회향은 보다 어려운 세계인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점철됐다.

월주 대종사는 해외 여러 국가들을 살폈는데, 특히 불교국가인 동남아 국가들의 상황이 열악했다. 학교와 수도, 전기 등 최소한의 기반시설조차 부족한 곳들이었다. 월주 대종사는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몽골,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을 직접 답사한 뒤 지구촌공생회 설립에 나섰다. 월주 대종사의 회고록 출간을 위해 상좌들이 모은 1억 원과 〈인도성지 순례기〉 출판을 위한 2억 원 등이 지구촌공생회의 종자돈이 됐고, 공생회는 불교계 인사들이 함께 만든 첫 국제개발구호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지구촌공생회가 처음 설립된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 이제 막 해외원조국으로 입장이 변화할 때였다. 공생회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몽골과 미얀마, 네팔과 케냐에 지부를 개설해 활동가를 파견하고 식수지원과 교육, 지역개발에 나섰다. 다양한 사업을 진행했지만 월주 대종사의 캄보디아 등 동남아 우물파기 운동은 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월주 대종사는 생전 “굶는 이에겐 법(法·진리)보다 밥이 먼저”라고 말했다. 월주 대종사의 원력 하에 2010년 1000번째 생명의 우물이 완공됐고, 2013년에는 2000번째 생명의 우물이 세워졌다. 미얀마에는 물탱크, 몽골과 케냐에는 핸드펌프와 모터펌프 등 급수공덕은 쌓여만 갔다. 월주 대종사는 총 2550개가 넘는 우물을 보시했다.

캄보디아와 네팔에서는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일을 찾아나서는 아이들을 문맹에서 벗어나는 공생의 삶으로 이끌었다. 케냐에 만해초등학교와 태공초등학교를 세웠고, 라오스와 몽골 등지에도 유치원과 초등학교 등을 건립했다. 월주 대종사는 생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구촌공생회 설립 취지문을 살펴본다고 했다. 인류의 삶이 서로 다르지 않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참 수행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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