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구산선문의 선사상

禪 우위, 생장하기 위한 몸짓
화엄교학과 조사선 비교 유행
‘단도직입’ 조사선법 우위강조

한국의 선종사에서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곧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중반에 걸쳐 형성된 소위 구산선문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정체성은 다양하다. 곧 최초로 한국에서 형성된 선문이라는 점이 그렇고, 그들 산문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서 선과 교의 입장에 대하여 일치 혹은 융합보다는 차별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 그러하며, 가지산문(迦智山門)과 희양산문(曦陽山門),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경우처럼 산문의 개산조 내지 그 전승자에 대한 법맥의 난맥상이 그러하고, 중국 조사선 사상의 수입으로 인한 그 전승 혹은 전개에 따른 구산문의 사상적인 정체성에 대한 구명 등이 그러하다. 이 가운데 선과 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후로 한국선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교에 대한 선 우위의 차별 및 상호간의 일치 내지 융합의 면모로 전승되어 왔다.

우선 선 우위의 전통은 구산문 가운데 몇 개의 산문에 보이는 공통적인 요소로 전개되었다. 구산문으로부터 비롯되는 선의 우월의식은 나름대로 연유가 있었다. 그것은 교학에 상대하여 실질적인 우월이라기보다는 선의 수입이 초기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신라의 땅에서 생장하려는 몸짓으로 자파의 존속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조사선법이 유입되던 시기에 신라의 불교계는 교학이 크게 발전하여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은 선종의 사람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교학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 속에서 새로운 사조에 속하는 선법의 특수성을 널리 인식시키고 보급하며 그것이 수용될 수 있도록 하려면 반드시 모종의 장치가 강구되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가지 선리가 새롭게 출현하였다. 그것은 선법의 측면에서 교학과는 차별되는 입장에 대하여 선법의 우월성을 내세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한국선의 전통 가운데 구산선문에서는 성주산문 무염(無染)의 〈무설토론(無舌土論)〉, 사굴산문 범일(梵日)의 선교판석(禪敎判釋)에 따른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 가지산문의 설악도의와 화엄종의 승통 지원(智遠) 사이에 벌어진 문답의 내용이 전한다. 이들 내용은 모두 선과 교의 차별을 논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특색을 보여준다. 그것은 선법에 대한 몰이해의 사회에서 당시로서는 비교적 새로운 불법이었던 선법의 전승을 성취하기 위해 애썼던 몇몇 구법승들은 당시의 교학불교와는 다른 측면으로 선법을 홍통하고 전승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그것은 곧 선법이 교학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차별화된 전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력은 당시 교학자들 가운데서 새로운 불교와 문물을 접촉하고 추구하려는 입당 구법의 열망과 부합되었다. 때문에 구산선문의 형성시기에 입당한 유학승들의 경우는 국내에서 이미 교학을 맛본 사람들이 그 대다수를 구성하였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는 특히 선과 교학의 차이점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아직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불법 곧 선법을 전승한다는 자긍심과 더불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교의적인 장치를 고안해냈다.

그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곧 당시 유행하던 화엄교학과 조사선법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우선 설악도의와 관련된 내용에서 몰종적(沒?跡)이라는 선법의 경우를 찾아볼 수가 있다. 가령 그 종취(宗趣)를 살펴보면 수행은 있지만 그 수행은 닦음이 없는 몰수(沒修)이고, 깨침은 있지만 그 깨침은 깨침이 없는 몰증(沒證)이라는 것이다. 곧 조사선법의 몰종적한 내용은 간접적으로는 서당지장과 백장회해의 영향을 수용한 것이었지만, 입당 유학승들에 의하여 초기선법의 전래부터 신라선의 특징이 되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몰종적의 사상적인 전승으로서 무념(無念)과 무수(無修)는 분별이 없고 조작이 없는 묘수(妙修)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전통은 일찍이 보리달마가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 보여준 것으로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동일한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가르침, 〈열반경〉과 〈능가경〉의 심법에 근거하여 이조혜가가 보여준 각성(覺性), 삼조승찬이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하고 있는 신(信)과 심(心)의 관계, 사조도신이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서 지시하고 있는 본래심의 유지, 오조홍인이 〈최상승론(最上乘論)〉에서 개시한 마음을 닦는 비결, 육조혜능이 〈단경(壇經)〉에서 내보이고 있는 본래자성의 활용방식, 남악회양이 혜능에게 답변한 것으로 본래 청정한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 수행이고 깨침이라는 말, 마조도일이 상당법어에서 설파한 것으로 깨침은 분별의 수행을 초월했다는 말, 백장회해가 그대로 노출시켜 보여준 깨침의 당체, 황벽희운이 수용한 홍주종지의 대기(大機)와 대용(大用), 임제의현이 납자들에게 지시해준 주인공의 가르침에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이고 입처개진(立處皆眞)이 있었다. 이들 개념은 보리달마 이후 지속적으로 계승되는 조사선의 일반적인 전개였다.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조사상(운부암).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조사상(운부암).

 

도의가 말하고 있는 몰종적의 선법이란 바로 이에 본래부터 타고난 깨침의 자성과 그것이 활용방식인 무념(無念)과 무수(無修)를 가리킨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경지를 터득하는 데에는 부득불 방편과 언설을 말미암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도의는 자연의 석가가 없고 천연의 문수가 없다고 말한다. 구산선문의 선리에 보이는 이와 같은 선교의 관계는 구산선문을 비롯한 다양한 산문을 통하여 점차 전법이 뿌리내리면서 선법의 측면에서는 교학과는 우월하게 차별된다는 관념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진정천책(眞靜天?)의 〈선문보장록〉에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전한다. 그 가운데 우선 〈진귀조사설〉의 경우에는 선교차별이면서 동시에 선법 가운데서도 조사선법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으로 대표된다. 가령 범일이 진성대왕에게 답하여 선·교의 뜻을 판별해주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명주 굴산사의 범일국사는 진성대왕이 하문한 선과 교의 뜻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본사 석가모니는 태어난 이후에 설법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먼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씩 걷고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말했습니다. 나이를 먹은 후에는 성을 벗어나 설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별빛을 보고 깨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깨친 법이 궁극의 경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개월 동안 조사이신 진귀대사(眞歸大師)를 찾아 유행하였습니다. 이로써 비로소 궁극의 뜻을 전승받았는데 그것이 곧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입니다.”

이것은 석가모니라는 여래가 진귀대사라는 조사에게 심인을 받았다는 것인데 석가여래와 진귀조사 곧 여래와 조사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국의 선종에서는 조사선의 권위야말로 어떤 선풍보다도 우선이었고 보편적이었으며 부처님을 대신할 정도였는데 그와 같은 조사의 개념을 진귀조사라는 인물에 투영한 것이다. 여래의 설법과 조사의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교화수단을 비교한 것으로 여기에서 비교대상에 해당하는 여래선은 교학을 상징하기도 한다. 때문에 석가라는 여래와 진귀라는 조사를 등장시켜 그 접화수단의 차이를 비유한 것으로 조사선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 점은 선교차별을 넘어서 선법 내에서도 접화방식의 경우에 조사선의 방식이 여래선의 방식보다 우월하다는 모습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곧 설악도의 시대 이후에 중국선종의 경우 소위 남종의 돈오적인 전통방식을 계승한 임제종의 흥륭으로 인하여 의리선(義理禪)의 전통보다 격외선(格外禪)의 전통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때문에 중국선의 전통을 강하게 수용했던 한국선의 경우에 임제종지만을 정통으로 간주하고 나머지는 방계로 간주하는 주장은 후대에 태고보우 및 나옹혜근의 어록을 비롯하여 청허휴정을 거쳐 환성지안과 백파긍선 등의 저술에서도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한편 〈무설토론〉에 의거하자면 무염은 직접적으로 선교의 차별을 설명하고 있다.

묻는다 : 유설(有說)과 무설(無說)이란 무슨 뜻입니까. 답한다 : 앙산혜적은 “유설은 불토(佛土)를 말한 것이므로 중생의 근기에 맞춘 법문이다. 무설은 선을 말한 것이므로 정법안장을 그대로 전승한 법문이다.”고 말했다. 묻는다 : 중생의 근기에 맞춘 법문이란 무엇입니까. 답한다 : 선지식이 눈썹을 치켜뜨거나 눈동자를 굴리는 것으로 법을 드러내는 것은 모두 중생의 근기에 맞춘 법문이다. 때문에 이것을 유설이라 하는데 하물며 언어이겠는가.

여기에서 교학은 혀가 있다는 것으로 설법을 의미하는 유설이고, 선법은 침묵을 의미하는 것으로 혀가 없다는 무설로 대비되어 있다. 따라서 유설은 사십구 년 동안 설법을 해온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유하고 무설은 상대적으로 말을 아끼는 것으로 보리달마의 침묵에 비유하였다. 이것을 유설의 경우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을 시설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춘 법문, 언설을 통하여 가르침을 베푸는 법문, 청정과 더러움을 분별하는 법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설의 경우는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충실하게 계승한다는 점에서 있는 그대로 전승한 법문, 언설을 초월하여 이심전심하는 법문, 청정과 더러움의 분별조차 초월한 법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무염국사의 질문에 답변한 법성선사의 설명에도 선과 교의 차별의식은 농후하게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제시된 내용은 어디까지나 선과 교의 차이에 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상에 앉아 있는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정사에 임한다. 그러나 국사를 담당하고 있는 모든 관리들은 각자가 맡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이에 신하들이 교학에 비유된다면 왕은 선에 비유된 것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성주화상(聖住和尙)은 항상 〈능가경〉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사의 종지가 아님을 알고서 〈능가경〉을 그만두고 마침내 입당하여 법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리고 도윤화상(道允和尙)은 〈화엄경〉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화엄의 원돈의 가르침이 어찌 심인의 선법과 같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역시 입당하여 법을 전수받았습니다. 〈능가경〉과 〈화엄경〉의 경우처럼 교학은 근본이 되지도 못하고 믿을 수 있는 교외별지(敎外別旨)도 아닙니다.”

이들 내용은 모두 교학을 공부하고 난 이후에 비로소 궁극적인 선법을 통하여 깨침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다. 심지어는 선법의 내부에서도 다시 자상한 설명을 가하여 드러내는 소위 교학적인 여래선법보다도 단도직입으로 조사선법의 우위를 강조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한줄 요약
구산선문의 다양한 의미와 정체성의 특징으로서는 선과 교의 입장에 대하여 일치 혹은 융합보다는 선(禪)의 우위를 주장하는 차별의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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