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설악도의의 사승관계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로 추앙
中광부 보단사서 구족계를 받아
서당·백장 문하에서 모두 인가
제방 유행하며 여러스승께 참문

도의(道義, 생몰 미상)는 현재 한국불교에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선의 역사에서 도의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매우 크다. 우선 도의에 대한 호칭은 여러 문헌을 통해서 보면 도의(道議), 도의국사(道義國師), 도의선사(道義禪師), 원적(元寂), 원적도의(元寂道義), 원적(元寂禪師), 명적(明寂), 명적도의(明寂道義), 설악도의(雪嶽道義) 등 다양하게 불리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설악도의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제반 선종의 문헌을 보면 당대 및 오대의 경우는 선자를 표기하는 경우에 보편적으로 그가 주석했던 지명과 더불어 법명으로 지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선의 경우라고 해도 송대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지명을 대신한 법호와 더불어 법명으로 지칭되어가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신라의 도의는 활동했던 시대가 당대에 해당하고 또한 설악산에서 주석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반적인 전통에 따르자면 설악도의가 되기 때문이다.

설악도의에 대한 문헌적인 자료로는 가지산문의 제3조 보조 체징(普照 體澄, 804~880)의 비문인 ‘장흥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문(884)’과 〈조당집(952)〉의 내용이 기본이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그 행장은 다음과 같다.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원적선사(元寂禪師)는 서당 지장(西堂 智藏, 735~814)의 법을 계승하였다. 명주(오늘날 강릉)에서 살았는데, 선사의 휘는 도의(道義)이고, 속성은 왕(王)씨이며, 북한군(北漢郡) 출신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상서로운 꿈을 꾸고 나서 상의하여 상서로운 꿈을 보면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름 쯤 지나서 태기가 있음을 알았는데, 39개월 만에 낳았다. 그날 밤에 홀연히 기이한 스님이 석장을 짚고 문 앞에 이르러 말했다. “오늘 낳은 아이의 태를 강가의 언덕에 갖다 두시오.” 말을 마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마침내 스님의 말을 따라서 아이의 태를 그곳에 묻었다. 순록들이 찾아와 지켜주었는데 해가 가도록 그만두지 않고 오가는 사람들을 보아도 해치려는 기색이 없었다. 이와 같은 상서로 인하여 법호를 명적(明寂)이라고 하였다. 당 건중 5년(784, 선덕왕 5년)에 한찬호(韓粲號)와 김양공(金讓恭) 등을 따라 바다를 건너 입당하였다. 곧장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보살상에 예배를 드리자 허공에서 성스럽게 종소리가 산에 울이는 것을 들었고, 신령스러운 산새가 비상하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광부(廣府) 보단사(寶壇寺)에서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에 조계에 도착하여 조계조사의 영당에 예배드리려고 하자 홀연히 영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세 번의 예배를 드리자 문이 이전처럼 그대로 닫혔다. 이어서 강서의 홍주 개원사로 가서 서당 지장의 처소에 나아가서 예배를 드리고 스승으로 모시면서 수행하여 의심을 해결하였다. 서당대사는 마치 돌 속에서 아름다운 옥을 주운 듯하고 조개 속에서 진주를 주운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참으로 정법안장을 전해준다면 바로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이에 도의(道義)라고 개명해주었다. 그로부터 두타행(頭陀行)을 하며 유행하다가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에게 나아갔는데 서당의 처소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에 백장화상이 말했다. “강서종의 선맥을 모두 동국에서 온 승에게 맡긴다.” 나머지 내용은 비문의 내용과 같다.

그리고 〈경덕전등록〉의 기록에 의하면 서당과 백장은 마조 도일(馬祖 道一) 문하의 이대사(二大士)로서 당시에 각립(角立)하였는데, 스승으로부터 각각 경은 서당 지장에게 흘러들어갔고 선은 백장 회해에게 흘러들어갔다(經入藏禪歸海)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설악도의는 이들 서당 지장과 백장 회해의 두 스승에게서 각각 인가(印可)를 받았다. 여기에서는 인가를 받은 사실에 대하여 전후의 시절에 대한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가는 그 이전에 당연히 깨침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깨친 경험에 대하여 인가를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두 차례에 걸친 인가에서 각각의 깨침에 대한 인가였는가 아니면 한 번의 깨침의 경험에 대한 두 번의 인가였는가 하는 점은 논외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인가의 문제는 깨침에 대하여 일회성인가 다회성인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깨쳤다는 경험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깨침에 대한 한 번의 경험에 대하여 인가하는 것은 스승이 바뀔 때마다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설악도의는 현재 조계종에서는 서당 지장의 사법자로서 조계 혜능의 남종선법을 최초로 한국에 전승한 사람으로 조계종의 종조로 확정되고 있는 점은 나름대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조계 혜능의 남종선법을 신라에 전한 도의국사 진영.
조계 혜능의 남종선법을 신라에 전한 도의국사 진영.

 

그런데 여기에서 설악도의의 사승관계에 대하여 보다 넓은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조계종의 상황에서 설악도의를 서당 지장의 사법제자로 간주하고 있는 이유는 두 차례 인가를 받은 사실을 두고 보자면 백장 회해를 참문하고 인가를 받은 것보다 서당지장을 먼저 참문하고 또한 먼저 인가를 받은 까닭에 근거한다. 서당과 백장이 입적한 연도는 814년으로 동일하지만 당시에 세수로 보면 서당은 80이고 백장의 66으로 서당이 백장보다 14세 연장자이다. 따라서 설악도의가 입당하여 몇 군데 성지를 참배한 이후에 스승으로 선지식을 찾을 즈음에는 이미 50세를 넘기고 있었던 연장자인 서당을 참문하는 것이 36세를 넘기고 있던 백장을 참문하는 것보다 여러모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서당이 백장의 사형이기도 하였던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설악도의는 당나라에서 37년 남짓한 세월 동안 구도행각을 하는 과정에서 서당의 인가를 받은 이후에 곧장 귀국하지 않고 다시 두타행으로 유행을 하면서 백장 회해에게 참문하여 서당의 문하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가를 받았다. 그런 연후에도 다시 최소한 7년 남짓한 세월이 지난 이후 821년에 귀국하였다.

조계종에서 설악도의에 대하여 적어도 제일차적으로 사법했다는 의미를 중요시하는 까닭에 서당 지장의 법맥을 계승했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현재 설악도의를 조계종의 종조로 내세우고 있는 명분이기도 하다. 곧 조계의 혈맥을 계승한 최초의 선자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중국 선종의 역사에서는 백장 회해가 마조 도일의 법계를 정통으로 사법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종의 사법관계에서 정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중요시되어 온 것이 사실이므로 정통선자의 법을 계승했다고 간주하는 것도 또한 자연스럽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본다면 설악도의가 서당 지장의 사법자이면서 더불어 당나라 당시부터 정통으로 간주되고 있던 백장의 사법자임을 부각시켜두는 것도 설악도의의 정통성에 대하여 보다 긍정적인 기능으로 작용할 것은 자명하다. 이런 경우와 관련된 일례는 선종사에서 여러 가지 사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중국 조동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동산 양개(洞山 良价, 807~869)의 스승인 운암 담성(雲巖 曇晟, 782~841)은 처음에 20여 년 동안 백장 회해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그 법을 계승했지만, 오히려 백장 회해의 친절한 배려심으로 인하여 이후에 약산 유엄(藥山 惟儼, 751~834)에게 참문하고 그 법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로써 운암 담성은 조계 혜능·청원 행사·약산 유엄·운암 담성으로 계승되는 법맥을 전승하게 되었다. 또한 당 말기부터 오대 초기에 형성된 중국의 선종오가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위앙종의 경우에 앙산 혜적(仰山 慧寂, 807~883)은 남양 혜충(南陽 慧忠, 775 입적)의 제자인 탐원 응진(耽源 應眞)의 법을 계승하였지만 이후에 위산 영우(쓳山 靈祐, 771~853)에게 참문하여 그 법맥을 계승하였다. 이로써 앙산 혜적은 남양 혜충·탐원 응진의 법맥으로부터 남악 회양·마조 도일·백장 회해·위산 영우·앙산 혜적으로 계승되어 위앙종의 조사법맥을 전승하게 되었다. 또한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 입적)은 귀종 지상(歸宗 智常)의 제자인 고안 대우(高安 大愚)에게서 깨침을 인가받은 이후에 황벽 희운(黃檗 希運, 850 입적)의 문하에 돌아와서 그 법을 계승하였다. 이로써 백장 회해·황벽 희운·임제 의현으로 계승되어 임제종의 개조가 되어 이후에 전승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 스승에게서 공부한 경우에 먼저 법을 계승한 스승의 법을 계승하지 않고 나중에 법을 계승한 스승의 법을 계승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이전에 계승한 선법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릇 정통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볼 경우에도 먼저 사승한 스승을 끝까지 계승한 경우도 부정되지는 있지만 더욱이 나중에 사승한 스승의 법을 계승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정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의 수증과 사법의 전통에 비추어보면 특별히 한 명의 선지식만 정해두고 공부하기보다는 제방을 유행하면서 여러 선지식의 가풍과 선기를 널리 다지면서 인연이 닿는 곳에 주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설악도의가 사승한 법맥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먼저 계승한 서당 지장의 법맥뿐만 아니라 나중에 인연이 닿았던 백장 회해의 법맥을 더불어 계승한다고 간주할 경우에도 이들은 모두 조계 혜능의 상속자일 뿐만 아니라 마조 도일의 홍주종(洪州宗) 가풍을 전승한 선자들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더욱이 수백 명의 납자를 거느리고 접화를 펼쳤던 백장의 법맥을 사승했다는 측면으로 보면 백장의 사상과 수증관을 정통으로 수록하고 있는 그 어록이 충실하게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법맥을 전승한 설악도의의 사상과 수증관을 도출해내는 근거와 자료도 대단히 풍부해진다. 더불어 백장의 어록이라는 문헌적인 영역의 확보는 물론이고 나아가서 조사선의 수증관을 크게 현창했던 홍주종 가풍, 그 가운데서도 백장 회해의 조사선 가풍에 보이는 수증관으로서 무수무증(無修無證) 내지 비심비불(非心非佛)의 사상적인 계보를 계승했다는 점에서도 충분한 근거를 보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상적으로 보아도 설악도의의 사상의 단편에 대하여 보조 체징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도의의 무념(無念)과 무수(無修)의 수증관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연결고리가 확보될 뿐만 아니라 법맥의 상승이라는 점으로 보아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는 증좌가 되기도 한다. 이로써 설악도의의 사승관계는 보다 확장될 뿐만 아니라 중국선종으로 계승된 조계종지의 정통법맥 내지 홍주종의 가풍을 고스란히 전승했다는 점에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 한줄 요약

서당 지장의 사법자로서 조계 혜능의 남종선법을 최초로 한국에 전승한 도의는 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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