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전법 소프트파워

전법과 전도는 불자 의무
불교 소프트 파워 키워야
새 문화 형성의 촉매되자
???????재가불자 불교스피치 이렇게

우리 재가불자의 모습은 첫째 자신 및 자신의 가족을 위한 소원성취기도, 둘째 깨우침을 위한 수행, 그리고 셋째는 경전공부 및 교리공부 등 빠른 복덕구족으로 소원성취 및 지식정보 습득 등이다. 모두가 다 소중하고 중요한 불자의 자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 근본 핵이 빠졌다. 바로 포교, 전법행이다. ‘불교’의 ‘불(佛)’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말하고, ‘교(敎)’는 우리가 좋은 말을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교’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불교’라고 지명해 놓은 것도 아니다.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과 우리 몸속의 보이지 않는 세포에 붙어있는 생명들까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가리킨다. 즉 미물 벌레 하나도 불교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내 몸 밖의 모든 세상과 내 몸속의 모든 생명들까지 -우리는 감사한 마음을 가득 가져야 하며, 이에 대해 혼자만 가질 것이 아니라, 주변에 알리고 표현해줘야 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은, 불법을 주변에 전하는 언행이다. 이는 곧 재가불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당위성으로서 불교를 전하는 행위와 함께 공감하고 나누려는 자비행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로서 이야기의 시대, 소프트웨어의 시대이며 스피치의 시대다. 더구나 세계화시대에 많은 지구인이 동시대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고 교류를 하며, 직접 만나는 시대가 되었다. ‘문화의 섞임 시대’ 즉 문화의 패치워크시대로서 다문화시대의 핵심은 다종교다. 어쩌면 문화 뿐 아니라 정치나 경제 그 이상의 모든 인류의 핵심에 종교가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화로 인해 세계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서로 공유하는 삶의 양상이 비슷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세계화 -> 다문화 -> 다종교로 펼쳐지는 이 과정에서 과연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직접 발로 걸어 다니며 전법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 불교의 시발점으로 봐야 한다. 우리는 법의 수레바퀴를 다시 굴려야 한다. 그것은 곧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어야 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마침 한류의 거센 전파가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 안에 흐르는 우리의 정신문화(Korean Spirits)는 불교사상이다. 숙성된 우리의 불교정신과 문화를 담고 있는 한국정신을 불자들이 전해야 한다. 한국인 해외교포는 700여 만명이다. 특히 미국은 한인들 세계에서 개신교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해외동포들 사이에서 사람을 만나려면 당연히 교회를 나가야만 한다. 한인 중 개신교는 61%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불교는 6%도 못 미치고 있다. 미국보다 유럽인들은 훨씬 더 종교적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전통적인 종교로 여겨왔던 가톨릭교의 정체된 모습을 본다. 이슬람계 이주민들은 그들이 지켜온 문화와 평화를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고, 반면 유럽인들은 무슬림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유럽 연합의 등장과 함께 도태된 유럽 국가 간의 경제 불균형과 그에 따른 경제 침체, 실업률과 범죄율 증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밀려오는 불법 이주민 문제와 더불어 쏟아져 들어오는 시리아 난민문제 등으로 유럽인들은 이제 전 세계적인 코로나 팬데믹으로 매일 거대한 스트레스에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유럽 대륙에 불교는 하나의 해결책으로 보일 수도 있다. 독일의 불교인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한국불자들의 포교에 대한 적극성보다는 독일의 자구책으로서 불교가 잘 맞아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할 때에 적극적인 포교행이 병행되면 더욱 활성화하는 데에 불을 지필 수 있을 것이다. 해외에서나 국내에서나 불자들은 이제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

21세기 정보화 사회에서 말은 곧 능력이다. 당장 바로 옆 사람에게 부처님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음식이 있으면 소문내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듯이 맛있는 것이나 좋은 것이 있으면 옆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도 우리의 정의 문화다. 불법의 향기가 옆으로 옆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불자라면 가장 중요한 본연의 자세이다. 내게 좋은 것을 남에게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다. 불법의 바퀴를 굴리지 않으면 바퀴는 더 이상 바퀴가 아니다. 불교는 박물관의 부처님이 아니다. 생활 속의 부처님, 일상의 부처님으로 모시는 일이 곧 포교이자 전법이다. 배운 만큼, 들은 만큼, 감동받은 만큼, 환희심을 경험한 만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말하는 방법 등을 배워야 한다. 이를 통한 전법과 전도는 부처님에 대한 예의이자 불자의 도리, 불자로서의 공덕이자 최고의 복을 짓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법전도의 상징인 수레바퀴

불상시대 이전, 무불상시대에는 부처님을 그리는 표상들(성스러운 나무인 무수나무나 보리수나무, 사라수 그리고 윤보(輪寶) 즉 법륜을 상징하는 수레바퀴모양, 삼보표치(三寶標幟·윤보 위에 山자 모양의 장식을 붙인 것으로 불법승 삼보를 상징), 불족적(佛足跡·윤보무늬가 선명한 부처님 발자국이나 발바닥), 불좌(佛座) 등이 있었으며 그 중 수레바퀴가 많이 나타난다. 그것은 전법을 상징하며 또한 강한 강조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불상시대 이후 여러 모양의 불상들 중 와불에서는 부처님의 발과 발바닥이 강조되고 있는데, 부처님의 발바닥에는 항상 전법륜 즉 수레바퀴가 새겨져있다. 이는 45년간 평생을 맨발로 걸어 다니며 설법을 하신 부처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다.

바퀴의 유래를 보면, 기원전 3~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메르인으로부터 시작돼 코카서스, 북유럽 등지에서 발명이 되었다. 그리고 유라시아 여러 지역으로 전파가 된다. 전염병이 쉽게 창궐하는 더운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사람과 가축에게 치명적인 병을 유발시키는 것을 우려해 전파되기 힘들었고, 아시아의 타이가지역(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 등 추운지역)에서는 도로내기 조차 힘들어 바퀴는 전파되지 않았다. 타이가에서는 여름에 대부분의 땅이 진흙땅으로 변하는 관계로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메리카 문명에는 수레가 없었다. 초기엔 신적인 신성한 루트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신만이 사용되는 것이지 인간은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바퀴의 발명은 지금의 핵무기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물건을 한꺼번에 옮길 수 있었고 이에 따른 이동과 이주, 여행, 정복, 전쟁 등이 생겨났다. 바퀴의 발명은 인류의 문명을 가능하게 했고 종교의 발달과 전파도 이 바퀴로 인한 것이었다.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융성한 곳은 의례 길이 잘 들어서고 그 길 위에 수레가 다니곤 했다. 박지원도 청나라에 가서 놀래서 감탄한 것이 수레도로였다. 열하일기에서 그는, 우리도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며 부러워했다. 이러한 바퀴는 많은 지역을 오가며 문물을 교환하고 낯선 이들과 만나고 색다른 문화를 접하며 융합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촉매제역할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바퀴를 부처님 설법과 전도의 상징물로 사용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역시 바퀴의 기능에 맞게 불교는 서로 다른 문화와 만나며 흡수하고 수용하면서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틀을 만들어갔으며 새로운 불자들도 양상되었다. 이것이 다 전파, 전법, 전도, 포교라는 힘이었다.

말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을 위해

사람이라면 남 앞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심지어 공포심으로까지 느끼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이러한 대중공포, 연단공포를 없애는 방법은 연습밖에 없다. 배우고 익혀서 계속 앞에 나가 서서 말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얼마만큼, 어느 정도로 말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불심이 가득 차올라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삶의 의미까지 새겨진 불자라면 부처님을 위해 앞에 나가 불교에 대해, 나의 불심에 대해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두려워 마다한다면 불심에 대한 사랑과 의미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아는 게 아니다. 말은 해봐야 하며, 해보면서 시간과 공간의 압축적 묘미를 터득해나갈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실전경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불자들의 모임대로 스피치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서 서로 돌아가며 스피치하는 경험을 공유하며 전도의 자신감을 키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대의 포교, 전법을 위한 자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포교사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이론과 실전의 자질을 갖춰야 한다.

불법을 전하는 재가불자는 교리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체득했을 때의 자신감과 신심증득을 토대로 남을 위해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반드시 정해진 시간 내에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며, 그 한정된 시간 내에 자신이 말해야하는 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해서 말하는 기술을 증득해야 한다. 말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위한 배려이며 공감을 위한 기술이다.

둘째, 포교의 목적은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남 앞에서 말하는 행위를 자랑하거나 잘난 체 하는 것으로 삼는다면 포교의 자질을 상실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으로서 포교는 성스러운 자비행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셋째,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말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 조리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법을 설하라”라는 말씀은 법을 설하는 사람은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적절하게 법을 설해야 한다는 뜻이다.

넷째, 포교스피치는 말과 진실성의 실천수행이다. 누구든지 어느 때 들어도 오해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설법이 필요하다. 또한 설법자는 자신이 말한 대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스스로 말한 것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소’에 불과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정확한 발음과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발성과 적절한 구사력 등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보여지는 자비스런 표정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이를 위한 자신의 수행과 마음닦음, 긍정으로의 명상 등이 우선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고 진실된 표정이 만들어져야 이에 맞는 음성과 표현력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실질적인 훈련과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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