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상호 존중과 연기적 사고

한쪽의 시각만 반영 하는
언론이 정치에 큰 영향 줘
국민 인식을 중도로 이끈
???????부처님 가르침으로 회귀

아파트 1층에 사는 주민이 엘리베이터 교체 비용을 못 내겠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1층 주민의 편을 들어주었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인 판결로 보인다. 1층에 사는 주민은 엘리베이터 사용할 일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동일한 소송이 또 제기되었는데 이번에는 법원이 소송을 제기한 1층 주민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유를 읽어보니 그럴싸했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1층보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의 1층 가격이 더 높다. 역시 논리적 판결로 보였다.

황희 정승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다른 사람 욕을 했다. 황희 정승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조금 있다가 다른 사람이 찾아와서 아까 찾아온 사람을 욕했다. 황희 정승이 이번에도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 사람이 가고 난 뒤에 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조카가 황희 정승에게 이 말도 맞다고 하고 저말도 맞다고 하니 잘못이라고 말하자 역시 그말도 맞다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세상사를 보면 이말도 맞고 저말도 맞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러나 재판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양쪽 논리가 일리가 있어도 해도 법원은 한쪽 편을 들어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선거 때가 되면 우리는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법정에서는 두 변호사끼리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싸우거나 검사와 변호사가 싸우거나 한다. 판사는 양쪽 주장을 듣고 판단을 내린다. ‘제가 판사 시절에는 변호사가 거짓말의 향연을 벌린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모른채로 재판을 했지요. 그런데 변호사를 하고 보니 재판은 정말 거짓말의 향연이더라구요’ 전직 판사 출신 변호사가 한 말이다.

민사재판은 당사자끼리 싸워도 되지만 대개 변호사를 선임하기에 변호사끼리의 싸움이 된다. 당사자끼리의 싸움도 변호사끼리의 싸움도 진흙탕 싸움이 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거짓말이 난무한다. 형사재판의 경우도 검사가 악의적으로 사건을 짜 맞추기를 하면 사실 관계를 교묘하게 소설로 변질시킨다. 거짓말하는 검사, 변호사에게 판사가 영향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판사 혼자 재판하는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양심이 있고 판단력이 좋은 판사를 어떻게 선정할 수 있을까? 차라리 반대의견의 개진 속에서 판사가 판결을 내려야 오히려 더 정의로울 수 있다.

검사는 범인이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변호사는 범인이 아니라고 입증하기 위해 역시 온갖 노력을 다한다. 민사사건에서도 변호사는 자기 편이 이길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때로는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고 상대방으로부터 유리한 합의를 끌어내기 위하여 없는 거짓말로 협박하기도 한다. 양쪽의 이러한 노력이 오히려 진실을 규명하고 정의를 실현하는데 더 적합한 방법일 수 있다. 혼자의 판결은 위험하다.

정치는 언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국민은 상당 부분 언론에 의해 정치적 판단을 한다. 국민 앞에서 대개 양쪽으로 나뉜 언론이 변호사와 또 다른 변호사의 싸움처럼, 검사와 변호사의 싸움처럼 공방전을 펼친다. 한쪽 언론만 듣고 결론을 내리는 국민도 많지만 요즘처럼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양쪽 언론을 접하는 국민도 많다. 신문을 구독했던 과거에는 자기가 구독하는 신문의 기사만을 읽었다. 요즘은 신문 구독자의 숫자가 격감하였다. 인터넷의 포탈을 통해서 수많은 다양한 언론의 기사를 접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말의 기술이다. 언론은 말을 담고 휘젓고 가공하는 장소이다. 언론은 정치와 정책을 평가한다. 언론이 어떤 정책을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면 그 정책은 성공한 정책이 된다. 언론이 어떤 정치인에 열광하면 국민도 열광한다. 언론이 관심을 가지는 이슈는 정책으로 반영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언론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되기 매우 어렵다. 정치는 언론이 좌지우지한다. 언론은 무관의 제왕이고 입법, 사법, 행정에 이어 제4부로 불리운다.

부처님은 교단이 출범했을 초기에는 계율을 제정하지 않으셨다. 불교가 계율중심주의로 형식화되어 종교로서의 생명력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계율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였지만 시대의 추이에 따라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불교계율을 갖추게 된다. 무엇보다도 승가의 규모가 커지면서 각종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고 승가의 원만한 유지를 위해서 질서를 지키고 불교정신에 어긋난 행위를 규제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는 사리불이다. 사리불이 오래 살았더라면 마하 가섭이 아니라 사리불이 교단을 이끌었을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보다 먼저 세상을 떴을때 부처님은 몹시 슬퍼하셨다. 부처님은 수차례에 걸쳐 사리불에 대한 칭찬과 신뢰를 표시하셨기에 교단 내에서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어떤 비구가 사리불을 비난하는 일이 발생했다. 부처님은 사리불과 비난하는 비구만이 아니라 모든 비구를 소집하여 이에 대해 의견을 듣는 방법을 택하셨다.

가장 부처님의 신뢰를 받았던 사리불마저 시비의 대상에 올랐으니 다른 비구는 오죽할까. 경전을 보면 비구끼리의 다툼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비구가 다툴 때마다 부처님은 모든 비구를 모아 양쪽 의견을 듣고 판단하셨다. 검사와 변호사의 싸움, 변호사와 변호사의 싸움을 통하여 판사가 결정하는 방법처럼 상가의 다툼을 해결하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참으로 현명한 방법이며 가장 공정한 방법이고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서 핵심은 청중이 있는 공방이라는 점이다. 당사자끼리만 있으면 서슴치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모든 비구가 있으면 거짓말이 드러나기 쉽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대체로 양쪽 견해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운다. 언론은 싸움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언론에게 양쪽 견해 중 그 어느 견해에도 기울지 않고 공정하기를 바랄 수 없다. 왜냐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론은 반드시 한쪽에 기울게 되어 있다. 마치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공정한척 위장한다면 그건 이중인격이고 위선이다. 미국은 대통령 선거 때 언론사는 자신이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지 밝힌다. 왜냐하면 절대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공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사는 유죄의 가능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변호사는 무죄의 가능성에 혼신의 힘을 다할 때 도리어 균형 있는 판결이 가능하다. 만약 검사와 변호사가 중립을 지키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안심되기는 커녕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하나의 가능성에만 몰두하여 노력할 때 사실 관계가 더 명료하게 드러나며 양쪽의 의견을 판사가 공정하게 종합할 수 있다.

언론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적 입장을 취하라는 요구는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요구다. 언론은 반드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어 있다. 차라리 치우칠 가능성을 100% 활용하는게 좋다.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잘못이라는 온갖 증거를 동원하는 언론과, 잘못이 아니라는 온갖 증거를 동원하는 언론이 있어야 역설적으로 국민은 더 잘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언론이 중도를 유지하겠다고 하다간 자칫하면 판단하기 어려운 애매한 기사만 가득할 수 있다.

복지를 찬성하는 언론은 복지에 대한 온갖 장점만 밝히고, 복지를 반대하는 언론은 복지에 대해 온갖 단점만 밝히면, 오히려 국민은 잘 판단할 수 있다. 복지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겠다는 의도로 적당히 장점과 단점을 버무리면 국민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속마음은 반대이면서 중립인척하며 왜곡시키거나 속마음은 찬성이면서 중립인척하며 왜곡시키는 것은 국민을 사실상 속이는 짓이다.

대부분의 언론이 한쪽 시각만을 대표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민의 공정한 판단은 어려워진다. 언론은 다양한 시각을 모두 국민 앞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압도적으로 한쪽 시각만이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된다면 정치는 잘못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다양한 시각이 전달될 수 있도록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고 언론사의 균형 있는 생태계의 조성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정부가 이러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국민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언론 환경의 조성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환경이 국민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요즘 가짜뉴스가 정치영역에서 넘쳐난다. 여당도 가짜뉴스의 폐해를 이야기하고 야당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가짜뉴스에 불만인가보다. 가짜뉴스는 악의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거짓말이다. 행정부가 가짜뉴스를 직접 규제하려고 하면 정부가 편향된 판단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언론자유를 제약한다. 가짜뉴스는 사법부에서 사법체계를 통해 정화될 수 있도록 하는게 최선이다. 가짜뉴스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이 쉽게 구제받을 수 있는 사법제도를 구축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선진국처럼 가짜뉴스로 입은 피해의 몇배를 배상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절실하다.

불교의 중도란 연기법의 실상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애매한 입장, 어정쩡한 중간이나 평균을 중도로 오해하면 안된다. 중간과 평균만 난무하면 이중인격적 뉴스만 난무하는 것이다. 중도국가란 수많은 다양한 의견이 서로 대립하는 곳에서 실현 가능하다. 가짜뉴스가 아니라면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뉴스 속에서 국민은 중도를 취할 수 있다. 양극단이 공존하는 속에서 우리는 중도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다만 국민은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을 떠나서 양극단을 쏟아내는 언론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여실지견의 지혜와 자세가 필요하다.

불교의 지혜는 세상을 비추는 지혜이어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편견, 독선, 아집, 선입관, 도그마, 집착,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부처님의 제자다. 연기의 중도 실상이란 편견, 독선, 아집, 선입관, 도그마, 집착, 탐욕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바람직한 언론환경이란 다양한 시각이 공정하게 경쟁하고 이에 따라 국민의 의견이 모아졌다가 수정되고 또 다시 모아지며 흘러가는 연기적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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