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갈등과 화쟁

절대 진리 없다는 생각과
자신의 견해도 틀릴 수가
있다는 인식에서 온유와
???????포용의 대화방법이 나와

스탠포드 대학에서 ‘죄수와 간수’라는 전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실험을 했다. 실험대상을 무작위로 죄수와 간수로 나눈 뒤에 각각 죄수와 간수 복장을 입혔다. 간수는 자유롭게 죄수를 다루도록 했는데 처음에는 간수와 죄수 모두 장난조로 역할을 시작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양상은 심각하게 변질되었다. 간수가 죄수를 학대하고 양쪽 집단에 적대감이 형성되었다. 실험은 계속 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간수가 죄수를 너무 심하게 다루자 사고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 실험이 유명해진 것은 현실 속에서 이 실험과 동일한 현상이 마치 복제된 것처럼 나타난 탓이다. ‘그건 실험일 뿐이야’라는 말이 전혀 맞지 않았다. 실험은 실험이 아니라 현실의 정확한 묘사였다. 이라크의 포로수용소에선 여군을 포함한 여러 명의 미군 병사가 이라크 포로를 학대했다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중 한 여군은 포로를 벌거벗기고 개줄로 묶고 끌고 다니면서 조롱했는데 그녀의 부모는 자기 딸은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충격을 표시했다. 쿠바의 미군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는 포로 중 학대를 견디다 못해 세 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와 유사한 각종 실험이 많다. 어린 아이도 두 집단으로 나누면 서로 적대적이고 증오의 감정을 가질 정도로 갈등을 겪는다. 방학 때 캠프에 온 어린아이를 두 집단으로 나눈 실험에서도 ‘죄수와 간수의 실험’에서 목격한 동일한 현상이 관찰되었다. 나이가 많건 적건 남자건 여자건 인간은 두 집단으로 나뉘면 적대적이 되고 증오의 감정을 가진다. 무작위로 나누어도 이런 감정을 보이는데 하물며 인종이 다르고 출신 지역이 다르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에서도 지역갈등은 망국병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나이가 많건 적건 남자건 여자건 자신과 다른 집단을 조롱하고 증오하는 모습은 이라크 포로수용소나 관타나모 수용소의 현상과 동일하다.

부처님은 인도의 작은 국가가 전쟁을 통해 병합되면서 큰 나라로 바뀌어가는 정치환경에서 평생을 보내셨다. 자신의 모국인 카필라 국이 코살라 국에 의해 거의 멸족 수준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것을 목격하셨다. 전쟁의 참상을 보며 부처님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고민하셨으며 연기법이라는 놀라운 불교의 진리를 발견하셨다. 국가 간의 전쟁이 없다 하더라도 인간은 서로 나뉘어서 싸우고 증오한다. 이유가 있을 때도 싸우고 증오하지만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분열한다. 분열은 이익과 어떤 형태로든 결합하기 때문에 싸움과 증오를 낳는다. 우리는 실험과 미군 포로 수용소 사례에서 보았듯이 별다른 이익이 없는데도 인간은 싸우고 증오한다.

연기법은 간수와 죄수가 별개가 아니라고 본다. 간수는 왜 간수인가? 죄수가 있기 때문에 간수이다. 죄수는 간수가 있기 때문에 죄수이다. 만약 죄수가 줄어들어 절반이 되면 간수의 절반은 직장을 잃는다. 알고보면 죄수는 간수에게 소중한 존재다. 죄수는 간수에 의해 다른 악질 죄수의 괴롭힘을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으니 알고보면 간수도 죄수에게 소중한 존재다. 죄수라는 단어에는 이미 간수의 요소가 있고 간수라는 단어에는 이미 죄수의 요소가 있다. 싸우지 않고 증오하지 않고 간수와 죄수로서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데도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싸우고 증오한다. 오직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싸우고 혐오하고 조롱하는게 인간이다.

아무리 부처님 앞에서 3천배를 하고 밤새워가며 기도를 하고 장좌불와에 용맹정진을 한들 인간 집단 사이에서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싸우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조롱한다면 불자가 아니다. 부처님은 가짜 출가자와 가짜 재가자에 대해 준엄하게 비판하셨다. 대한민국 정치가 서로 나뉘어 싸우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조롱하는 정도가 도를 넘었다. 불자라면 적어도 부처님의 말씀대로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원효 대사는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고 전란의 참상이 아직도 남아 있던 시기를 사셨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이 신라의 국민과 어떻게 차별되는 집단으로 살았을 것이 충분히 상상이 간다. 중국에 천태 대사가 있다면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원효 대사가 있다. 원효 대사의 화쟁 사상은 종파 간의 대립과 싸움에 적용할 수도 있지만 서로 나뉘어 싸우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조롱하는 중생 사이의 대립에도 적용할 수 있다. 원효 대사의 화쟁 사상은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진정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여실지견이 없으면 화쟁은 불가능하다. 원효 대사는 제도권 불교권력에서 벗어나 중생 속으로 뛰어들어가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우리가 한국 사람으로 불자라면 우리 불교사에 가장 자랑스러운 원효 대사의 화쟁 정신으로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은 해야 한다.

정치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데도 우리는 상대의 약점과 문제점을 찾아내서 어떻게 해서든지 흠을 내려고 안달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 독재는 악이고 싸워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즘 접하는 수많은 정치적 갈등은 상대적인 가치관과 선호의 문제이다. 정치를 선과 악의 대결로 보면 양극단에 치우치며 중도를 벗어난다. 정치란 정답을 찾자는게 아니라 서로 다른 해법을 최대한 중재하고 갈등을 최소화하여 국가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어차피 절대 진리란 없는데 우리가 목을 매어 집착해야 할 이념이나 가치나 정책은 없다.

우리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고 주장하면 싸움이 된다. 내가 그토록 맞다고 생각하는 주장이 어쩌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결과일 수도 있다.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세상이다. 가짜뉴스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날 정치 현상은 대부분 전문가가 분석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언론은 이 역할을 대신하지만 우리의 언론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포털 사이트 ‘다음’은 뉴스를 정리해서 보여주지만 ‘네이버’는 신문사별로 나열하기에 독자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과거에 한겨레 신문, 경향 신문을 먼저 읽고 조선, 중앙, 동아를 읽을 수 있게 순서를 설정했다. 왜냐하면 먼저 접하는 매체에 더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약자의 신문을 먼저 읽어야 균형이 잡힌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거꾸로 읽는다. 조선, 중앙, 동아를 먼저 읽고 한겨레, 경향을 읽는다. 강자의 신문을 먼저 읽으면 압도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 한겨레나 경향에서 상반된 주장을 읽어도 웬만한 주장은 조선, 중앙, 동아를 읽으면서 형성된 의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조중동을 먼저 읽었는데도 한겨레나 경향의 기사가 타당하다고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는 정말 자신 있게 한겨레나 경향의 주장이 상대적으로 더 신뢰한다.

내가 먼저 읽는 언론이 내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선, 중앙, 동아를 먼저 읽는 이유는 또 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였으며 노무현 대통령을 도와서 일을 한적도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나를 친노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나는 아무래도 한겨레, 경향의 논조에 더 기울기 쉽다. 그러나 나는 가능하면 내게 주어지는 모든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접하고 싶다. 따라서 조선, 중앙, 동아를 먼저 읽는다. 나의 이런 노력이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데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원효 대사는 화쟁 사상을 주장하면서 사람은 상대의 주장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무조건 자신의 주장에 집착한다고 했다. 정치 논쟁에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는 상대의 주장을 사실 심층적으로 잘 알지 못한채로 몇마디 말만 듣고 금방 단정해버린다. 나는 요즘 사람들과 정치 이야기를 가능하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감한 주제는 몇시간이고 대화해야 겨우 내 생각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진정한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피상적으로 몇마디 하다가 금방 선입관으로 결론이 나고 시간부족으로 대화는 중단되고 서로 오해한 채로 집으로 간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이야기해도 대화가 안되는 상대도 있다. 자신의 모든 생각은 미리 정해 놓고 상대방이 100%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그 어떤 주장에 대해서 1%도 인정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가짜뉴스에 속아서 엉터리 논리를 펴고 있을 때 가짜뉴스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짜가 아니라고 하거나 가짜라고 인정하더라도 다른 이유를 찾아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이런 사람과도 대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대화하되 녹음하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면 인간은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이런 환경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나친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부처님은 비구끼리 다툼이 생기면 당사자를 모든 비구 앞에 세워 놓고 서로 자기 주장을 펴게 했다. 당사자끼리 싸우면 거짓말을 검증하기 쉽지 않지만 모든 비구 앞에 세우면 거짓말이 쉽게 들통난다. 어느 한쪽이 억지를 부릴 때 모든 비구가 이를 지켜보면 억지를 부린 사람은 추후 승가에서 외톨이가 된다. 나는 요즘 많은 사람에게 공개되고 내용이 기록되는 토론이 아니면 정치적 대화는 삼가고 있다. 가짜뉴스와 억지가 많은 사람에게 공개되고 기록되는 환경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대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나 있는 사람, 거친 언어를 쓰는 사람, 음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사람, 흥분된 사람, 싸우고 싶어 씩씩거리는 사람과는 아예 대화하고 싶지 않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하고, 이 세상에 절대 진리란 없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도무지 상대의 의견이 들어갈 여지가 한치도 없는 사람과 대화해서 무엇하나. 우리는 각자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자신 없어 해야 한다. 자기가 잘못된 정보에 기초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화쟁의 대화법은 겸손하고 온유하며 포용적인 말투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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