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무의식과 초의식

마음 속 마음의 ‘무의식’
개인 넘은 초의식 발현
에고 사라지는 참나 삶
???????평등 자비 지혜가 나와

23-1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비롯된 습관이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있습니다. 우리가 맘대로 조절할 수 없는 마음에는 뿌리깊은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밭은 방치하면 잡초 무성한 가시밭이나 자갈밭, 황무지가 되어 폐허처럼 변해 버립니다. 세상이 갈등과 대립으로 싸움이 그치지 않은 것도 마음 관리를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마음공부(명상)를 꾸준히 하면 본래 마음이 정초되어 반복되는 악습은 점점 해체되고 좋은 습관과 바른 성향이 자리잡게 됩니다.

23-2 흔히 마음이라 하는 것은 평상시 마음입니다. 평상시 마음은 개념을 사용합니다. 모양과 이름으로 인식하여 해석하곤 하지요. 그런데 평상시 마음만 마음일까요? 그것은 하늘에 구름만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평상시 마음 너머 마음의 본바탕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명상입니다.(웃음)

명상은 평상시 사용하는 마음을 잘 바라보기입니다. 바라보는 그 마음이 우리를 무지의 어둠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명상자가 호흡과 함께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가 되면 평상시 마음이 조용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감옥 속에서 바깥 하늘을 조그만 창을 통해 보는 것과 탁 트인 공간에서 하늘을 보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본바탕을 덮고 있는 구름들을 걷어내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명상은 이 구름들을 바라보고 자각함으로써 점차 그것들을 약화시킵니다. 개념을 사용하려드는 평소의 마음을 바라보고 알아차림으로써 밝은 마음이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오래된 습관들은 좀처럼 버릴 수 없습니다. 평상시 마음은 조건화되어 있어서 잠시 옛습관을 버렸다가도 금방 종전처럼 되돌아가고 맙니다.

23-3 살면서 겪은 경험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억 속에 그리고 기억보다 더 깊은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됩니다. 아뢰야식(여래장식; 제8식)이 그것이지요. 어린 시절 겪은 두려움, 분노, 외로움, 거부당한 느낌, 소외감, 차별감 등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에 묻혀 있다가 우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미 경험한 두려움이나 분노는 너무 고통스러워 다시 경험하기를 두려워하지요. 에고의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그것을 회피하거나 다른 시도를 통해 없애려 들고 그 고통을 대면하지 못하게 그럴싸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냅니다.

무의식은 마음 속의 마음이라고도 불리며 의식이 평소 자각하지 못하는 의식 세계를 일컫습니다. 모태에 수정된 이후 자궁 속에서 경험하기 시작하여 출생후 겪는 모든 경험들의 저장소이기도 하고 기억하기 차마 싫고 너무 끔찍하고 혐오스러워 의식 세계에 간직하고 싶지 않고 간직할 수 없는 상처의 기억들의 집합소이자, 모든 신화와 예술의 칭고이자 종교의 뿌리이기도 하고 선험적인 내용들, 긍정적이고 예지적이며 창조적인 지혜가 간직된 곳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의식-무의식으로 분류하기엔 보다 넓은 정신 세계가 존재한다고 서구심리학은 집단 무의식과 자아초월의식을 말하기도 합니다.

23-4 동양에선 이미 고대로부터 명상 수행을 통해 접하는 의식 세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초의식입니다. 이 초의식의 세계는 개인 의식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지복감, 이유없는 환희와 감동, 조건없는 사랑과 연민, 그러면서도 칭찬 비난, 행 불행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부동의 평정심 등. 의식과 무의식의 주인으로 자처하는 에고가 넘볼 수 없는 의식 세계입니다. 에고가 온전히 작동을 중지하였을 때 드러나는 세계라 하겠습니다. 마치 구름들이 하늘의 전부가 아니듯이 허공은 우주의 모든 걸 안으면서도 오히려 남음이 있고 나나 누구의 허공도 아니고 내 종교 네 종교의 하늘로 구획할 수 없어 개념으로 다가갈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에고가 주재하는 의식-무의식 세계와 달리 초의식 세계는 신성(불성)의 바다이지요. 신성함이 흐르고 내면의 지혜가 작동하며 조건 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한 그 곳이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가 뿌리한 곳입니다. 그곳은 허공처럼 태어난 바도 없고 죽는 바도 없으며 모든 판단 분별을 넘어서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잉태하였지만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고 무엇으로 한정할 수 없는 신들과 인간, 지옥계를 아우르는 광대한 의식 세계입니다.

23-5 우리가 어린 시절 성장 과정에서 늘 경험한 것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나날이 새로움이었지요. 새로운 것들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관점이 새로워지고 그리고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경험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점 이 경험은 둔해지다가 마침내 기억에서 아슴프레 사라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날이 그날이고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되풀이 되고 내일에 대한 기대도 별로 갖지 않게 되버렸군요. 마음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의식의 다른 자락을 걷어 올리게 되면 어린 시절 경험하던 새로움에 다시 환희하게 됩니다. 모든 순간을 늘 깨어 새롭게 자각하기 때문이지요. 이 경험을 넘어서 온전히 내가 죽고 사라져 버리는 지극한 고통(영적 고통)을 겪고 나면 그 때 비로소 죽음의 어둠에서 새로이 태어나게 됩니다. 죽음은 정신적-영적 재탄생으로 승화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니 피하거나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군요. 오히려 주인으로 행세하는 에고의 항복을 받아낼 기회이기도 하지요. ‘모든 걸 다 내가 한다’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에고가 항복을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 에고의 작동은 멈추게 되고 에고의 배경이 전면으로 드러납니다. 에고가 구름이라면 배경은 푸른 하늘입니다. 더 이상 에고의 껍질에 싸여 바라보는 게 아닌, 에고의 감옥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은 자연과 세상과 더불어 연결되고 분리감을 느끼지 않으니 가슴에 피어나는 따사로움, 기쁨과 연민, 가슴 깊이 고요함으로 비로소 변환이 일어납니다. 거듭 태어난 삶은 환희롭습니다. 매사를 단조로운 반복으로 느끼고 모든 걸 판단하고 평가하는 대신, 삶의 파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천진한 아이처럼 호기심으로 즐기며 감상할 수 있게 됩니다.

23-6 두 주인이 우리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수다스럽고 많은 것을 요구하고 신경질적이고 계산하기 좋아하는 에고이고, 다른 하나는 잔잔한 지혜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숨어 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에고는 가짜 주인이고 내면의 지혜가 진정한 주인입니다. 에고가 개념에 불과한 가짜 주인임을 깨닫고 진정한 자기로 사는 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그것은 개념과 지식으로 사는 삶이 아니고 에고가 사라져야 열리는 참나의 삶입니다. 머리가 아닌 모든 영적 성찰과 순수한 자각인 불성은 우리의 내적인 스승입니다. 내적인 스승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포기하는 일이 없고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스승입니다. 우리가 내면에 귀 기울이는 순간 늘 만날 수 있는 친구이지요. 인간의 형상과 목소리와 지혜를 지닌 우리의 외적 스승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적 지혜의 외부적 표출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내면의 스승인 불성을 망각하고 에고의 미혹에 갇혀 기나긴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숙고) 눈을 감고 호흡을 바라보며 고요히 앉아 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드넓은 초원에 앉으세요.

공평무사하게 모든 것을 비추는 햇빛을 떠올려 보세요.

세상의 모든 강들을 받아들이는 바다를 떠올립니다.

이렇게 평등하게 조건없이 모든 것을 따사롭게 감싸는 자비가 불성의 특징이고 또한 햇빛처럼 모든 것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비출 수 있는 지혜, 어떠한 느낌에도 치우침이 없는 평등한 자비와 지혜가 불성의 특징입니다.

23-7 마음의 본바탕(자비와 지혜)은 에고의 분별하는 마음이 녹아 없어지는 순간 만날 수 있군요. 에고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투사를 일삼습니다. 상대방 헐뜯는데 분주하지요.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마음은 금방 흩어져 에고의 지배를 받지요. 에고의 준동임을 자각하면 평소의 투사하는 관습에서 벗어나지만 잠시만 부주의해도 에고에 지배당하고 맙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자각(알아차림)은 어둠 속의 불빛과 같습니다. 자각은 불성의 빛으로 마음의 본향으로 안내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꾀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본래 고향에서 고요히 바라본다면 불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다에는 잔잔한 파도만이 아니라 거친 파도도 있습니다. 거친 파도가 일어나 으르렁거리다가 바다의 고요함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분노나 욕망이나 질투 같은 강렬한 감정도 호흡과 함께 깨어 바라보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고 저절로 가라앉게 됩니다. 늘 호흡과 함께 바라보세요. 삶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냉대하지 않고 환대하며 바라보면 억압된 감정이 자유롭게 풀려나게 됩니다. 이것은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는 처방이기도 합니다.

23-8 가짜 나인 에고에 대한 집착은 우리의 온갖 부정적인 생각, 감정, 욕망, 행위들의 원인입니다. 에고에 대한 애착이 우리를 불행과 재앙으로 이끕니다. 삶의 고해에서 끝없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가짜 나에 대한 오래된 집착을 내려놓으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껴안는 자비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에고의 이기적 집착을 다스릴 묘약이 바로 자비심입니다. 자비는 모든 치유의 근원이고 지난날의 부정적인 카르마뿐 아니라 미래의 씨앗인 현재의 카르마까지 정화시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받았음을 자각하면 감사의 마음이 가슴에서 파도처럼 일어나 자비로운 에너지가 도와준 사람뿐 아니라 상처 준 사람, 나아가 자연의 모든 것을 향해 흘러가게 되고 온 우주가 연결되어 감사와 사랑으로 파동칩니다.

모든 것 이전에 있었고 모든 것 이후로도 있을
어둠이 걷히고 먹구름이 걷히면 스스로 드러나는 세계.

무한한 의식이요 무량한 빛 그 자체.
최상의 지혜요 자비로운 진정한 모습.
에고의식에서 벗어나 무한의식으로 연결되어 하나되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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