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마음·부처·중생

“여러분! 그대들이 지금 눈앞에서 쓰고 있는 것이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으니라. 그런데도 믿지 아니하고 밖으로 향해 찾아 헤맨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밖에서 구할 법이 없고 안에서도 얻을 법이 없느니라. 그대들이 산승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취하는 것이, 찾는 마음 쉬어 아무 일 없는 것만 못하느니라. 이미 일어난 것은 계속되지 않도록 하고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10년 행각하는 것보다 낫느니라. 산승의 견처로는 이러쿵저러쿵 말할 게 없느니라. 다만 평소 하는 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일없이 보내면 되느니라. 제방에서 온 그대들이 모두 뜻하는 마음이 있어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며, 해탈을 구하고 삼계(三界)를 벗어나기를 구하나니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그대들이 삼계를 벗어나 어디로 가려는가? 부처니 조사니 하는 말은 자신을 묶어두고 좋아하는 말일 뿐이니라. 그대들이 삼계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마음자리(心地)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라. 그대들이 한 생각 탐내는 마음이 욕계(欲界)이고, 그대들이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색계(色界)이며, 그대들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無色界)이니라. 이 삼계는 그대들 집안의 가재도구니라. 삼계가 스스로 ‘내가 삼계다’ 말하지 않느니라. 도리어 여러분들의 눈앞에 뚜렷하게 만물을 밝게 비추고 세상을 짐작해 헤아리는 사람이 삼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니라.”

보고 듣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조사나 부처의 마음과 추호도 다름이 없다. 이 점을 임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마음 밖에 법이 없다’는 말은 이미 선가(禪家)의 상용어(常用語)가 되다시피 하였고 〈화엄경〉 경문에도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법은 이미 나한테 있는 것이므로 밖으로도 찾을 것이 없고, 안으로도 찾을 것이 없다. 마음을 쉬어 가만히 있는 것이 10년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마음이 가는 길을 멈추라는 말이다. 언뜻 평소 생활 그대로가 공부라는 말로 들린다. 밥 먹고 옷 입고 활동하는 일상사를 떠나 별도로 하는 수행처가 없다는 말이다. 이 모두가 임제의 종지인 돈오돈수(頓悟頓修)에서 나온 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도를 깨달은 분상에서는 똑같은 말이 빈번하게 나온다. 영가 진각(永嘉 眞覺, 647~713)의 〈증도가(證道歌)〉 첫 구절이 “그대 보지 못했는가? 배움을 끊어 할 일 없는 도인은 망상을 제거하지도 않고 참된 것을 구하지도 않는다네. 무명의 실제 성품이 곧 불성이며 허깨비 같은 헛된 몸이 곧 법신이라네.(君不見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라고 하였다.

〈신심명〉을 쓴 승찬(?~606)이 출가 전 젊은 시절 풍질(風疾-문둥병)에 결려 여러 지역을 방랑하다가 혜가를 만났다. 이때 서로 문답한 대화의 장면이 〈전등록〉에 나온다. 먼저 승찬이 여쭈었다.

“제가 몹쓸 풍질에 걸렸습니다. 청하오니 저의 죄를 참회시켜 주십시오.”

“그대의 죄를 찾아온다면 참회시켜 주겠네.”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 이미 그대의 죄를 참회시켜버렸네. 마땅히 불법승(佛法僧)에 의지해 살아가게나.”

“지금 스님을 뵙고 이미 승보(僧寶)는 알았습니다만, 무엇을 불보(佛寶)라 하고 법보(法寶)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마음이 곧 불보이고 이 마음이 곧 법보이네. 법과 불이 둘이 아니며, 승보도 또한 그러하다네.”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그러하듯이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닙니다.”

삼보가 마음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임제는 “삼계를 벗어나 어디로 가려는가?”라고 묻고 삼계가 다름 아닌 탐, 진, 치 삼독(三毒)이라고 이색적으로 말했다. 삼독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解脫)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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