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체로금풍(體露金風)

가로의 은행나뭇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바로 옆의 은행나뭇잎은 아직도 파랗다. 5m도 안 될 지척거리라 환경조건이 거의 같을 텐데도, 일찍 물길을 닫은 부지런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계속 물길을 열어놓은 게으른 나무도 있다.

집 뜰의 은행나무는 한껏 게으름을 부리다가 늦게야 황금빛으로 변했다. 간밤에 영하로 내려가고, 무서리 내린 아침에 보니 은행나무는 하늬바람에 잎을 모두 떨구어 앙상해지고, 밑동 주위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여있다. 풍성한 여름을 만끽하며 풍경이 울 때마다 부채춤을 추어대던 그였다. 이제 화려하지만 군더더기 속박이었던 황금빛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알몸인 채로 쨍하게 파란 하늘을 우러르며 사색과 인고(忍苦)의 겨울채비를 한 것이다.

송(宋)의 설두 중현(雪竇 重顯)이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등에서 참선에 참고가 되는 100개의 고칙(古則)을 선별하여 각각에 게송을 붙인 〈송고백칙(頌古百則)〉이 있다. 이에 송(宋)의 원오 극근(成悟 克勤)이 수시(垂示)·착어(著語)·평창(評唱)을 덧붙인 것을 원오의 제자가 편찬·간행한 〈벽암록(碧巖?)〉의 제27칙은 다음과 같다.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 스님에게 물었다. ‘나무가 시들고 잎이 떨어지면 어떠합니까?”

운문 스님이 대답하였다. “가을바람에 (앙상한) 알몸이 드러난다.” [僧問雲門。樹凋葉落時如何 雲門云。體露金風]”

〈佛果圓悟禪師碧巖? T2003_.48.0167b24-25〉

운문체로금풍(雲門體露金風)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고칙은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眞禪師廣?)〉에도 나온다. 여기에서 나뭇잎은 분별망상(分別妄想)을 뜻해, 나뭇잎이 떨어진다는 것은 분별망상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금풍’은 가을바람이고, ‘체로’는 사물의 참 면모[本體, 眞貌]가 완전히 드러난 것을 뜻해, ‘체로금풍’은 가을바람이 불어 낙엽이 지고 나목(裸木)만이 남듯이, 번뇌 또는 분별망상이 떨어져 순수한 본래의 진면목(眞面目)이 드러난다는 비유이다. 이는 곧 백장선사(百丈禪師)가 말한 체로진상[體露眞常, 참되고 항상한 본체의 드러남]이다.

“백장선사가 상당[上堂; 선종의 장로나 주지가 법당의 강단에 올라가 설법함]하여 이르되,

‘신령스런 광명이 홀로 빛나니 육근[六根;여섯 감각기관]과 육진[六塵; 여섯 감각대상)을 멀리 벗어났네 / 본체가 참되고 항상함을 드러내니[體露眞常] / 문자에 구애되지 않네 / 심성[心性; 마음의 성품]은 (번뇌에) 물들지 않아 / 본래 스스로 원만하니 /다만 망령된 인연[妄緣] 여의면 / 곧 여여(如如)한 부처님이네. [(百丈禪師)上堂(曰):「靈光獨耀,?脫根塵。體露眞常,不拘文字。心性無染,本自圓成。但離妄緣,?如如佛。」]”

〈五燈會元 卷第三(X80n1565_003) 百丈章(0071a09) 중에서〉

이는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인 신령스러운 광명[靈光]이 청정하게 비침을 가리킨 요긴한 법문으로, 〈경덕전등록(景?傳燈?)〉 권9 고령신찬장(高靈神贊章)에도 실려 있다. 고령사(古靈寺)의 강사인 계현(戒賢)에게 득도(得度)해 경문(經文)을 배우던 신찬(神贊)이 백장 회해선사(百丈懷海禪師)에게 가서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돌아왔다. 제자의 심상치 않음을 마침내 알아챈 수업사(受業師) 계현이 상당법문을 요청했고, 신찬은 백장의 위 법문내용을 설해 스승을 깨닫게 하여 보은하였다는 일화이다.

범부는 감각기관이 항상 밖으로 향해있어 감각대상을 만나 오염된 채 망령된 인연[妄緣]으로 살아간다. 감각기관을 거두어 안으로 향해, 자성광명(自性光明)을 가린 이러한 망연을 끊어서, 신령스러운 광명이 스스로 빛날 수 있다면 이것이 깨달음이요 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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