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 이룬 나한, 신앙이 되다

초전법륜의 다섯 비구가 ‘기원’
십육나한·오백나한으로 확대
선종의 발전… 신앙 ‘자리매김’
韓나한도, 당말~송초 성립돼
원대 오백·천이백 나한 확장

일본 지온인에 소장된 ‘오백나한도’. 고려 14세기 후반에 조성됐다. 석가 삼존을 중심으로 3~4명씩 무리를 지은 나한들은 매우 사실적이며 유기적으로 표현돼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 이어서 정각을 이룬 이들을 ‘아라한(Arhat, 阿羅漢)’, 일반적으로 ‘나한’이라고 칭한다. 나한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며, 석가모니의 열반부터 미륵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할 때까지 이 세상의 불법을 수호할 위임을 받은 분들이다. 

나한이란 말은 본래 석가모니를 부른 존칭이었으나, 〈비나야 대품〉 등의 초기불전에 의하면 사르나트(녹야원 설법 혹은 초전법륜)에서의 첫 설법을 함께한 다섯 수행자인 카운디누야·밥파·밧디야·마하나마·아쉬바지트가 깨달음을 얻어 석가를 포함한 여섯 사람의 아라한이 생겼다고 한다.  
나한의 기원은 위의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서 시작하여 이후 석가의 직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십육나한과 부처의 열반 직후 왕사성에 모여 1차 불전을 편찬한 오백나한까지 확대되었다. 간다라 지역에 남아있는 초전법륜상에 표현된 다섯 수행자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세 구복이나 신통력과는 상관이 없는 수행하는 승려형의 모습으로 표현이 되어 있을 뿐이다. 과연 언제부터 나한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 다양한 신통력과 지물을 지닌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까?

나한에 대한 신앙은 선종의 성행으로 심화되었다고 한다. 선종은 부처와 자신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이념 중 하나가 화북지방에서 발전한 것으로, 선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도선(道宣, 596~667)이 편찬한 〈속고승전〉에 남인도 출신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선정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보리달마는 527년 양(梁)나라 무제(武帝)와 만난 뒤 뤄양(洛陽)의 사오린사(少林寺)에서 9년 동안이나 좌선을 했다고 전해지며,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 사오린사가 중국 선종의 본산이자 소림 무술의 발상지가 되어 16명의 나한 복장을 한 수련생들이 관광객들에게 무술공연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종은 9세기 중엽에 신라의 승려가 중국에서 수용해 온 뒤 나말여초 9산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선종의 유행으로 나한의 신앙화는 고려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나한 신앙은 현장(玄唆)이 654년에 한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密多羅所說法住記)〉 이후 유행하였는데, 이 책은 기원 후 4세기 경 사자국(스리랑카)의 난제밀다라가 설한 것으로 첫 번째 존자 빈도라발라타사(賓度羅跋눾惰?)부터 열여섯 번째 존자 주도반탁가(注茶半託迦)까지 16나한의 명칭·거주지·권속 수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6나한의 능력에 대해서 16나한 모두가 해탈하여 한없는 공덕을 갖추었으며, 삼장(三藏)을 외우고 지녔을 뿐만 아니라 외도(外道)들의 전적(典籍)에도 널리 통하였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교시를 받들어 신통력으로 자기의 수명을 늘려서 석가모니의 바른 법이 언제나 머물러 있도록 잘 보호하면서 시주(施主)들에게는 큰 과보를 얻게 한다고 하였다.


4세기 경 성립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나한의 특정한 신통력이나 현세 구복의 구체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어, 적어도 4세기 경까지는 특정한 나한에게 고유한 능력을 부여하거나 도상적인 구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受記品)’에서는 “…오백의 아라한인 우루빈라가섭(優樓頻螺迦葉)·가야가섭(伽耶迦葉)·나제가섭(那提迦葉)·가류타이(迦留陀夷)·우타이(優陀夷)·아누루타(阿樓馱)·리바다(離婆多)·겁빈나(劫賓那)·박구라(薄拘羅)·주타(周陀)·사가타(莎伽陀) 등도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모두 얻으리니, 그 이름 또한 모두 보명이리라”라고 오백나한을 모두 ‘보명’이라 부른다고 적혀있을 뿐이다.

또한 일본인 유학승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중국에 머물렀던 838~847년 사이의 기록에 많은 사찰에서 나한도와 나한상을 모셨다고 적혀있어 이미 나한 신앙이 유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나한과 관련된 초기의 경전 및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산속의 동굴이나 신비스러운 노송 아래 동자와 호랑이를 거느리고 앞에는 경책과 석장을 지닌 초월자 나한의 모습은 당말~송초 무렵에 성립된 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신장성 위구르자치구의 천산산맥 북쪽의 북정(北庭, Besh-baliq) 서쪽에 위치한 위구르 왕실의 불교사원 서대사(西大寺)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사이에 건립된 인공의 석굴사원으로, 그 내부에 소조로 만든 16나한상과 나한을 그린 벽화가 남아있다. 소조의 나한상 뒤로 험준한 산맥과 기이한 나무 아래 구불구불한 백발의 머리와 눈이 크고 코가 높은 나한이 석장으로 용을 부리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신통력을 지닌 중앙아시아 승려의 모습은 이후 오대 북송시기에 제작된 나한도에서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고승들의 이미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고, 원대와 명대를 거치며 좀 세부적이며 구체화되었다.   

현존하는 고려와 조선의 나한도들을 볼 때 중국의 당말 오대북송 시기에 성립된 나한도상이 중원의 원·명·청으로 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석가를 포함한 다섯 수행자에서 비롯된 나한은 원대에 이르러 십대제자, 십육나한, 십팔나한, 오백나한, 천이백오십나한 등 여러 종류로 확대·발전하였다.  

고려와 조선의 나한도는 대략 세 가지의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 폭에 한 분의 나한을 그리는 형식이다. 둘째 한 폭에 석가삼존(석가모니와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과 오백의 나한을 모두 그린 그림이다. 셋째 한 폭에 석가삼존과 십육나한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그림이 모셔지는 전각을 나한전 혹은 응진전(應眞殿)이라 하며, 오백나한의 경우 오백나한전·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이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오백나한과 관련해서 가장 이른 기록으로 〈삼국유사〉의 탑상편에 오백나한을 오대산 백련사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도경〉 권17 광통보제사조(廣通普濟寺條)에 923년 양(梁)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고려문신 윤질(尹質)이 오백 나한상을 가져와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안치하였으며, 개경의 남쪽에 있던 광통 보제사 나한전에는 오백나한상과 오백나한도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 왕실에서 오백나한재 및 나한재를 열어 기우와 외적의 퇴치를 기원했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나한의 신앙화와 유행은 중국과 시기적으로 크게 차이 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나한도의 최고작이며 전 세계에서 유일한 작품을 고른다면 고려 시기에 제작된 ‘오백나한도’라고 하겠다. 이 그림은 하나의 화면에 다양한 산수를 배경으로 석가삼존과 십대제자, 십육나한, 오백나한을 생동감있게 표현한 것으로, 각 존자들의 설법·신통력·선정·일상생활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오백나한의 도상학적 근거는 없지만, 송나라 문신 진관(秦觀)이 쓴 문집 〈회해집(淮海集)〉에 그가 감상한 오백나한도를 기록한 ‘오백나한도기’의 내용과 고려 〈오백나한도〉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송에서 고려에 전해진 한 폭 형식의 오백나한 도상이 동아시아 중에서 고려 불화에서 유일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