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선이야기] 22. 감산덕청 선사 
[인물로 읽는 선이야기] 22. 감산덕청 선사 
  • 정운 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20.11.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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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능통·삼교회통 明代 최고 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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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경’ 독송 듣고 환희심 일어
어머니의 권유로 12세에 출가해
‘念佛是誰’ 화두, 염불 공안 집중
유교, 도교에도 학문 조예 깊어
열반 20년 지나도 법구 ‘변화無’
진신상, 남화 선사 육조전 봉안
중국 광동성 남화선사 육조전에 봉안된 감산덕청 진신상. 덕청의 법구는 20년 지나도 살아있는 듯 했다고 전해진다.
중국 광동성 남화선사 육조전에 봉안된 감산덕청 진신상. 덕청의 법구는 20년 지나도 살아있는 듯 했다고 전해진다.

덕청의 행적 
감산덕청(1546~1623)은 명나라 4대 고승 중의 한 명이다. 덕청은 선·화엄·염불 등 불교학뿐만 아니라 수행에도 깊으며, 지극한 염불행자이기도 하다. 덕청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스님이기도 하다. 

덕청에 대해서는 10여 년 전에 〈감산자전〉이 번역되며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선지식이다. 책에서 덕청 선사는 직접 자신의 일생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감산자전〉은 당시 명나라의 불교사와 상황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스님은 20~30대에는 출가 사찰인 남경 보은사·북경·오대산에서 수행했고, 40대에는 산동성의 뇌산에서 중생을 교화했다. 50대에는 광동성 뇌주로 유배되어 소주 조계산에 머물렀다. 60대에는 호남성의 남악에 머물렀고, 70대에 강서성의 여산 등지에 머물렀다. 

덕청은 안휘성 금릉 전초현 사람이다. 이름은 덕청(德헌), 자는 징인(澄印), 시호는 홍각선사(弘覺禪師)이다. 덕청의 모친은 평생 관음 기도를 하였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관음보살이 동자 하나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덕청을 낳았다. 9살에 덕청은 사찰의 학당에 다니며 공부를 하였다. 그곳에서 덕청은 〈관음경〉 독송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능히 세간의 고통을 구한다(能救世間苦)’라는 구절을 듣고 환희심을 내었다. 어린 덕청은 스님에게 책을 빌려 그 경을 모두 외웠다. 이후 모친에게 〈관음경〉을 독송해주자,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덕청이 12세가 되자, 부친은 신부감을 구해 아들과 정혼시키려고 하였다. 스님은 아버지에게 승려가 되겠다고 하였고 부친이 반대하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자기 포부를 펼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합시다. 아이를 원하는 대로 사찰로 보냅시다.”

자식이 원하는 길이라 인정하고, 호탕한 마음으로 자식을 출가시킨 모친이다. 자서전에 보면, 덕청이 출가 후 모친을 처음 만난 것은 44세로, 덕청이 자신의 출가 본사에 대장경을 안치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은 50세에 유배를 가는 길 위에서다. 

덕청은 12세에 남경보은사서림 영녕의 제자로 출가하였다. 출가 후 덕청은 주요불경을모두외웠고, 유교와도교경전까지섭렵했다.19세에 덕청은 서하산(棲霞山)의운곡법회(雲谷法會, 1500~1579) 선사를만나 중본명본의 어록 〈중복광록〉을 배우고 참선에 뜻을 두었다. 이러면서 덕청은 ‘아미타불’염불을 하였다. 그러다 어느날꿈속에서아미타부처님을 친견했고, 다시 덕청이 관음·세지두보살을 함께 만났다. 이를 계기로 덕청은 염불수행에 확신을 가졌다. 

이후 덕청은 출가 본사인 보은사로돌아와〈화엄현담(華嚴玄談)〉을 공부하였다. 덕청은 강의를 듣는 도중 십현문(十玄門)의 ‘해인삼라상주처(海印森羅常住處)’라는구절에이르러,홀연히마음이열리면서법계가원융무진한 도리를 깨달았다. 

덕청의 활동 
덕청이 20세에 천계사에서안거할때운곡선사로부터‘염불시수(念佛是誰)’ 공안을 받았다. 덕청은 이때부터 염불 공안에 집중했다. 석 달이 지나자, 덕청은 마치꿈속에있는것처럼 느껴졌다. 대중가운데 있어도 대중이 보이지 않았고,일상의 행위를 하고 있을때에도 그것을의식하지못했다.

그런데 이 무렵, 본사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덕청은 본사를 중수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이런 원력으로 중국 전역을 유행했고, 이러면서 덕청은 학문과 수행이 깊어지게 된다. 1573년 28세에 오대산에 들어가 북대(北臺)에 위치한 감산의풍치가마음에들어이 산 이름을 호로 삼았다. 같은해반산(盤山)의한석실에서홀로수행하는은자를만나함께수행하다가삼매를 체험했다. 산하대지와몸과마음,온세계가텅빈 체험을했지만,은자의가르침대로그런경계에도집착하지않고더욱향상일로를걸었다. 

30세에 덕청은북경에 머물다 묘봉 선사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가 수행했다. 삼매에 든 내용은 아래 서술한다. 1년간에 걸쳐 수행이 깊어질 때, 운서주굉이 찾아왔다. 덕청이 주굉보다 11세나 연하지만, 두 선지식은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며 법거량을 나누었다. 

33세에덕청은 부모님의은혜를기리며피를 내어 〈화엄경〉 한 부를 사경했으며, 38세에동해뇌산으로 옮겨 가서 움막을짓고안거하면서 염불수행에 집중했다. 그 지역은 역대로 도교가 융성했던 곳으로 불교에 문외한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불법을 홍포하며 염불로 교화하였다. 

덕청의 만년 활동 및 저서 
1595년 50세에조정의정쟁에연루되어 누명을 쓰고 광동의뇌주(雷州)로유배당했다. 그곳에서불법을널리전하며 선과 화엄의 융합 및 유불도삼교의합일을주장하였다.스님의 가르침을따르는사람이많아서옛오나라땅에머문5년동안강남과강북의 불교가 흥성하였다. 

56세에는100여년동안폐사가 되어 있던 육조 혜능의 사찰 남화사(南華寺)를복원하기 시작했다. 선사는 도량을 정비해 스님들이 살도록 하였고, 인근 출가자에게 계를 주며, 청규를 새로 제정했다. 1606년 61세에덕청은 황손탄생을빌미로 유배에서 사면되었다. 몇 년 후인 1614년태후가죽자비로소승복을입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덕청은 60대에 강연을 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대중교화에 앞장섰다. 74세 무렵에는 오유봉에서 목석암을짓고〈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금강경〉 〈기신론〉 〈유식〉등 경론을 강의했다. 이해 8월보름에는폐관(閉關)하고 사중 일을 내려놓았다. 76세에도 덕청은 제자들에게 〈능가경〉 〈조론〉 〈기신론〉 등을 강의하였다. 1622년77세에 덕청은 조계 남화사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1623년 10월 병에 걸리자, 대중을 운집한 뒤 “생사 문제가 크고,죽음이 금방 닥쳐옵니다”는 말씀을 남기고 앉아 입적했다. 

탑 안에 덕청의 감(龕)을 모셨다가 땅에 감을 묻었다. 다시 탑 안에 모셨다가 남화사로 옮겼다. 덕청이 열반한지 20년이 흘러서다. 제자들이 감을 열자, 살아있는 듯손톱과 발톱, 모발이길게자라있었고,살색은선홍색일정도로육신이그대로였다. 제자들은 스님의 진신에는 전단향액을 발랐다. 덕청의 진신상은 현재 광동성 소관 남화선사 육조전에 모셔져 있다. 

덕청의 삼매 경지
덕청의 자서전을 살펴보면, 수차례의 삼매 경지가 나타나 있다. 〈감산자전〉을 중심으로 보기로 한다. 

30세에 덕청은 묘봉선사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오대산에서 가장 험준하다는 용문사 부근에서 토굴을 짓고 1년 넘게 정진했다. 온산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이고, 주위가 고요해 수행하기에 좋았다. 그런데 얼음이 녹자, 계곡에 물소리가 천둥 우레처럼 요란했다. 묘봉 선사가 덕청에게 말했다. “경계는 마음에서 생기며,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境自心生 非從外來). 고인이 말하기를 30년간 물소리를 듣고도 의근이 동요되지 않는다면 관음보살의 원통경지(觀音圓通)을 증득한다.” 

덕청이 묘봉의 말을 듣고 나무다리 위에 혼자 앉아 수행한지 얼마 후 자신을 잃어버렸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로소 흐름이 끊어지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어 마음이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소리에 방해받지 않았다. 관음보살의이근원통을증득한 것이다.

덕청은 경행에 나섰다가 홀연히 삼매에 들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 오직 큰 빛의 세계가 펼쳐졌는데, 원만 담적한 것이 둥근 거울과 같았다. 산하대지가 그 속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나의 자각은 명료하고, 내 몸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후부터 덕청은 안팎이 담연하여 소리나 형상에 장애받지 않았다. 이때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덕청이 삼매에서 일어나 토굴로 돌아오니 솥에 먼지가 뿌옇게 쌓여있었다. 

덕청은 31세에 제자인 평양 태수 호공(胡公)의 집에 잠시 머문 일이 있었다. 방에 들어 삼매에 들었는데, 5일이 지나도록 좌선한 채였다. 하인들이 방에 들어가 불러도 대답이 없고, 몸을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공은 그제서야 요령(삼매를 깨울 때 쓰는 것)을 가져와 귓가에서 수차례 흔들어 깨웠다. 

덕청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다. 한참 지나서야 자신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았다. 덕청은 이 경계를 궁극적인 경지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덕청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꿈속의 일과 같았다. 이때의 경계는 광활한 창공처럼 깨끗했다. 마음이 텅 비고, 경계는 고요했으며,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때 덕청은 이렇게 말했다.

“고요함이 지극하면, 빛이 일체에 두루하고, 적연한 비춤이 허공을 머금는다. 알고 보면, 관음보살도 꿈속의 일이로다.(靜極光通達 寂照含虛空 꿺來觀世間 猶如夢中事)” 

덕청에 대한 역사적 평가
덕청의 철학적 소양은 불교사상을 뛰어넘어 있다. 유학과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교의 〈대학〉이외에도 〈중용직지〉 〈노자해〉 〈장자내편주〉 등 수많은 주석서를 저술했다. 이 저서에는 모두 유·불·도 삼교의 조화가 담겨 있다. 또한 기문둔갑이나 풍수지리·음양팔괘·사주 등 덕청은 학문이 통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이다. 현대 중국철학자 남회근(1918~2012)은 덕청을 “일개 승려의 몸으로 당대를 뒤흔들었던 사람”이라고 극찬하였다.

불교학으로는 선·화엄·정토 등 다양한 경전에 섭렵해 있어 〈감산어록〉 〈관능가경기〉 〈법화경통의〉 〈법화경격절〉 〈원각경직해〉 〈기신론직해〉 〈감산노인몽유집〉 등을 저술했다. 곧 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이와함께 덕청은 정토행자였다. 〈아미타경〉을 독송하며, 경전을 필사했고, 늘 아미타불을 염했다. 스님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끊임없이 염불에 몰두하였다. 오래지 않아 해지는 방향의 하늘에 높이 앉아있는 아미타불이 꿈속에 나타났다. 자비로 빛나며 맑고 생생한 눈과 친절한 얼굴을 보고서 나는 사랑과 슬픔 그리고 행복의 혼합된 감정을 느끼면서 그의 발아래 몸을 던졌다.” 

덕청은 다방면에 뛰어났던 승려로서 운서주굉과 대등한 명나라 최고의 승려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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