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고려시대 차세(茶稅)

차 산지는 ‘토공조’로 부과
차세로 인해 과도한 노동도
이규보, 시?편지 통해 우려
관직 오른 벗 손한장에게
“노약자까지 제다에 동원”

고려시대의 차세(茶稅)는 일종의 토공(土貢)으로 부과되었던 듯하다. 토공은 특산물이 나는 지역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그러므로 지역마다 토공의 종류가 다르다. 차를 토공(土貢)하던 지역은 대개 차의 산지이다. 대략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의 토공조(土貢條)에서 확인할 수 있어 고려 시대까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려 후기 과중한 차세의 부과로 백성이 겪는 고통은 컸던 듯하다. 이를 지적한 인물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이다. 무신 정권기를 살았던 그는 ‘손한장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보내다(孫翰長復和次韻寄之)’에서 과도한 차세로 인한 백성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는데, 이는 한림원의 원장으로 부임하는 손득지(孫得之)에게 당부한 말이기도 하다. 손득지가 진양의 부기(簿記)를 맡았을 때 그 곳을 찾아갔던 이규보였다. 진양은 진주의 옛 이름. 진주는 차의 명산지였기에 그를 찾아온 이규보를 위해 화계를 유람했다. 차를 좋아하는 벗을 위한 큰 배려였던 셈이다. 이랬던 벗, 손득지가 사명(司命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관장하는 관청)을 관장하는 높은 관직에 올랐는데, 거듭하여 창수(唱酬)하는 시를 보냈다. 이에 화답한 시가 바로 ‘손한장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보내다(孫翰長復和次韻寄之)’이다. 이 시에서 이규보는 두 사람 간의 교유를 이렇게 밝혔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문장가가(古今作者雲紛紛)
초목을 품제(品題)하여 호탕한 기개 발휘했네(調?草木騁豪氣)
장구(章句)를 마탁하여 스스로 기이함을 자랑했는데(磨章琢句自謂奇)
사람들의 읊조림은 각각 다르구나.(到人牙頰甘苦異)
장원의 시 홀로 뛰어났으니(壯元詩獨窮芳?)
아름다운 문장 뉘라서 찬탄하지 않으리(美如熊掌誰不嗜)
임금님이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불러들여(玉皇召入蓬萊宮)
은대의 요직(要職)에 등용하였네.(揮毫?墨銀臺裏)
그대의 재주는 낙락한 천길 소나무이니(君材落落千丈松)
불초한 이 몸은 칡덩굴 같네(攀附如吾類??)

청자 찻잔(靑磁陽刻蓮瓣文茶盞).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시대에 이규보를 능가할 문장가가 뉘일까 마는 장원한 손득지의 문장을 “장원의 시 홀로 뛰어났으니(壯元詩獨窮芳邑)/ 아름다운 문장 뉘라서 찬탄하지 않으리(美如熊掌誰不嗜)”라고 극찬했다. 그러니 임금께서 그를 은대 요직인 한림원의 장으로 부르신 것이라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장구(章句)를 마탁하여 스스로 기이함을 자랑했는데(磨章琢句自謂奇)/ 사람들의 읊조림은 각각 다르(到人牙頰甘苦異)”다는 것이다. 손득지와 자신을 비교하면 손득지는 소나무요 자신은 칡덩굴처럼 하잖은 존재라 하였다. 벗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양이 극을 달한다. 이규보가 유차라는 차 이름을 지었던 것 운봉의 규선사와 관련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당대에서 널리 회자하였던 일이었던 듯하다. 이어 이규보는 이렇게 노래했다.

우연히 유차의 시를 지었는데 (率然著出孺茶詩)
그대에게 전해짐을 어이 뜻했으리(豈意流傳到吾子)
시를 보자 화계 놀이 홀연히 추억되구려(見之忽憶花溪遊)
옛일 생각하니 서럽게 눈물이 나네 (懷舊悽然爲酸鼻)
운봉차를 품평한 구절엔 향취가 없는데 (品此雲峯未嗅香)
남방에서 마시던 맛 완연히 느껴지네(宛如南國曾嘗味)

그가 “우연히 유차의 시를 지었는데(率然著出孺茶詩)”라고 칭한 것은 바로 “운봉에 사는 규 선사가 조아차를 얻어 자신에게 보여주기에 유차(孺茶)라고 이름을 붙였고, 시를 청하기에 지어주다(雲峯住老珪禪師 得早芽茶示之 予目爲孺茶 師請詩爲賦之)”라는 시를 말한다. 조아차는 가장 일찍 딴 차 싹으로 만든 최고급차다. 그가 유차라 이름 붙인 것은 젖비린내 나는 여린 차라는 의미일 것이다. 바로 그 시를 손득지가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얘기를 담은 손득지의 화운 시를 보자 화계를 유람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규보의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따라서 화계에서 차 따던 일 논하였으니(因論花溪採茶時)
관에서 감독하여 노약(老弱)도 징발(徵發)하였네(官督家丁無老稚)
험준한 산중에서 간신히 따 모아(?嶺千重眩手收)
머나먼 서울에 등짐 져 날랐네(玉京萬里?肩致)
이는 백성의 애끊는 고혈(膏血)이니(此是蒼生膏與肉)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바야흐로 이르렀네(?割萬人方得至)

윗글에 의하면 이규보가 우려한 것은 바로 노약자까지 징벌하여 차를 따는 일이었다. 험준한 산중을 헤매야 하는 노약자의 수고로움은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등짐으로 수도까지 날라야 했던 고역을 무엇으로 드러내랴.

그런데 손득지는 바로 임금의 언로를 출납하는 관리로 임명되었으니 백성의 고충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아마 임금에게 백성들의 이런 고통을 알려 선정을 충언해야한다는 진의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알려진 바와 같이 무신 정권기에 차는 사치와 화려함이 극을 이뤘던 시기이다. 승가에서도 임금의 행차를 위해 앞을 다퉈 다정을 설치하고 고급 차를 올렸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차세를 받쳐야 했던 백성의 노고는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던 때이었다. 이규보가 차는 “백성의 애끊는 고혈(膏血)이니(此是蒼生膏與肉)/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바야흐로 이르렀(휤割萬人方得至)”라고 한 것은 당시의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원래 차는 사람의 몸과 마음의 불평을 씻어내는 영초(靈草)다. 그러나 이런 차를 얻기 위한 이면에는 수많은 노동과 땀으로 만들어지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고려 시대에 유행했던 단차(團茶)나 백차(白茶)는 수많은 공력이 소모되어 만든 차였다.

이규보도 차를 극히 좋아했던 독서인이었다. 그러나 차세의 어려움을 알았던 그였기에 이런 탄식을 토로한 것이다.

어이 차 달여 부질없이 물 허비할쏜가(安用煎茶空費水)
일천 가지 망가뜨려 한 모금 차 마련했으니(破却千枝供一?)
이 이치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이없구려(細思此理眞害耳)
그대 다른 날 간원에 들어가거든(知君異日到諫垣)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하게나(記我詩中微有旨)
산림과 들판 불살라 차의 공납(貢納) 금지한다면(焚山燎野禁稅茶)
남녘 백성들 편히 쉼이 이로부터 시작되리(唱作南民息肩始)

앞의 인용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차 한 잔은 실로 “일천 가지 망가뜨려 한 모금 차 마련(破却千枝供一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 한 잔에는 차나무를 기른 천지의 기운과 차를 만드는 사람들의 수많은 공력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이규보의 간절한 바람은 “그대 다른 날 간원에 들어가거든(知君異日到諫垣)/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하게나(記我詩中微有旨)”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가 진정 바랐던 건 어진 정치일 터다. 이는 차세에 고통을 덜어 주는 일이다. 차를 좋아했던 그이지만 “산림과 들판 불살라 차의 공납(貢納) 금지한다면(焚山燎野禁稅茶)/ 남녘 백성들 편히 쉼이 이로부터 시작되리(唱作南民息肩始)“라고 노래 한 그의 속내는 무엇이었던 걸까. 실제 손득지는 한림원의 원장이 되어 이규보의 뜻을 헤아렸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이런 충언을 주고받았던 이들의 우정은 ‘한장(翰長) 손득지(孫得之)가 화답 시를 보내왔기에, 다시 위의 운에 차하다(孫翰長得之見和。復次前韻)’에서 “평생의 교분(交分) 변치 않기로 기약하였고(始終交契期膠漆)/ 선후의 공명 자연의 운명에 맡겼노라(先後功名任杏梅)”라고 노래했다. 이들의 우정을 깊게 한 것은 뜻을 담은 시이며 차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포부는 “바다 같음을 일찍이 알았지만(早識脩鱗橫海大)/ 이 세상이 술잔보다 좁은 것을 어이하리(其如魯國小於杯)”라고 노래했다. 바다와 술잔 참으로 대비되는 비유이다.

아무튼 고려 말기의 차세의 폐단은 조선이 건국된 후, 차가 쇠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니 이는 차 문화의 성쇠가 사람들의 과욕이 빗은 결과이다. 시대마다 사람들이 차를 탐하는 정도에 따라 그 성쇠가 반비례해 왔다는 점에서 반성의 여지가 크다 하겠다.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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