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깨침의 길 4

20살 시절 큰형님이 결혼을 하면서 처음으로 양복을 입게 되었다. 그 당시는 양복점에서 치수를 재고 옷을 맞춰 입었기 때문에 비교적 몸에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잘 안 입던 옷이어서 그런지 조금은 불편했다. 양복을 입은 설렘에 한껏 폼을 잡아보았지만, 폼이 잘 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폼 잡기도 쉽지 않지만 폼 나기는 더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옷 입는 것도 그러한데, 우리네 삶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깨침의 세계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삶, 고통의 삶을 청산하고 깨침의 길로 들어섰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폼이 잘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생으로 살았던 습기(習氣)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여러 종파에서 깨달음의 세계에 단계와 과정을 설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는 곧 폼 잡는 단계에서 폼 나는 단계로 한층 성숙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깨침에 이르는 과정을 4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소승사과(小乘四果), 혹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한다. 성문이란 글자 그대로 붓다의 음성을 직접 듣고 수행하는 제자를 가리켰다. 그런데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下化衆生)’ 보살이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하면서 성문은 홀로 연기의 진리를 깨치는 연각(緣覺)과 함께 소승으로 분류되었다. 성문과 연각, 보살을 흔히 삼승(三乘)이라 부른다.

성문사과에서 맨 처음으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간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라고 한다. 이를 한자로 입류과(入流果), 혹은 예류과(預流果)라고 하는데, 깨침이라는 흐름(流)에 들어갔다(入)는 뜻이다. 이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사성제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색·성·향·미·촉·법의 경계에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수다원과에 들게 되면 욕계(欲界)와 색계(色界)를 7번 반복한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처음으로 양복을 입고 폼을 잡는 단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사다함과(斯陀含果)다. 일래과(一來果)라고도 부르는데, 천상계와 인간계를 한번 왕래한다는 뜻이다.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들었으나, 아직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윤회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수다원과에 비하면 수행이 많이 익은 단계다. 비유하자면, 양복을 자주 입어서 몸에도 익숙하여 폼이 조금 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아나함과(阿那含果)다. 이 경지는 불래과(不來果), 혹은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하는데, 윤회하는 세계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행이 많이 익어서 더 이상 욕심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는 경지다. 양복을 입었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은, 그러니까 폼이 아주 잘 나는 상태에 비유하면 어떨까 싶다.

마지막 단계는 아라한과(Arahan, 阿羅漢果)다. 이 단계는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은 경지다. 번뇌라는 도적을 죽였다고 해서 살적(殺賊)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이룬 성인 가운데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사찰에 있는 나한전(羅漢殿)은 바로 아라한을 모신 전각이다.

이처럼 성문사과는 번뇌를 끊은 정도에 따라 깨침의 질적 차이를 두고 있다. 경전에도 ‘누구는 수다원과에 들었다, 누구는 아라한과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물론 이것은 수행의 차이에서 결정되지만, 근본적으로 얼마나 폼이 잘 나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폼은 구체적인 삶에서 드러난다. 결국 그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가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에 관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논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돈점논쟁의 핵심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얼마나 깨치고 닦았는지는 순간순간 부딪치는 경계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앞서 반복한 것처럼 폼 잡기도 쉽지 않지만 폼 나기는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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