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혜인 스님 1

 

불자 대원성 보살 전

前生(전생)에 比丘(비구) 比丘尼(비구니)가 원력으로 탄생하셨는지 家內(가내) 식구 모두가 불심에 가득하고 항상 부처님 일이라면 우선으로 하시는 훌륭한 信心(신심)에 이곳 서귀포에서 고개 숙여 합장(合掌)하옵고 지난 번 미국에 계시는 恩師(은사)스님을 위하여 연꽃모임 여러분들의 誠金(성금)으로 부족한 여비를 마련해 드린 데 대하여 그 고마움을 새삼 회상토록 하고 있습니다. 그 돈이 아니었더라면 남미 계획을 변경하고 귀국할 정도로 어려웠다 하시며 “그 고마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네” 하시니 이 모두가 대원성보살이 앞장서서 걱정해 준 덕분이며 연꽃모임 여러분들의 잊을 수 없는 善根功德(선근공덕)인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사업에 福(복)된 加護(가호)가 常存(상존)하시길.

                                                              서귀포 중문 토굴에서 혜인 스님이

약천사를 짓기 전, 작은 초가집에서 주신 글이다. 스승인 일타 스님이 미국에 가셨을 때 연꽃모임이 마련해 드린 작은 성금을 받으시고 고마웠던 마음을 적어 보내셨다. 그때는 모든 여건이 어려울 때였다. 서로를 돕는 일이 무엇보다 값진 시절이었다. 돌아보면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는 좀 더 서로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시절이 어려웠던 만큼 모든 것들이 소중했던 것 같다. 그런 시간 속에서 만났던 인연들 모두가 소중하고, 특히나 선지식과의 만남은 그 시절을 살게 한 큰 힘이었던 것 같다. 세연을 끝내고 원적에 든 선지식들과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일은 내게 그 시절만큼이나 따뜻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일타 스님의 맏상좌였으며 은해사 조실이었던 혜인 스님은 제주도 약찬사를 중창해 제주도를 대표하는 사찰로 만들었다. 그리고 단양 광덕사에서 64만 평 규모의 세계일화도량 대작불사도 회향하셨다.

45년 전, 내가 30대였을 때 스님을 처음 뵈었다. 스님은 일타 스님의 말상좌였고, 나는 일타 스님의 유발상좌였다. 스님과 나는 서로 다른 경계에 살고 있었지만 같은 스승을 모셨다. 스님과 나는 서로의 경계를 지키면서도 가족처럼 형제처럼 지냈다. 스님은 부산에 볼 일이 있을 땐 일을 마치고 꼭 우리 집에 들러 공양도 하시고, 더러는 묵었다 가시기도 하셨다. 공부가 덜 된 탓으로 나는 스님과 다른 생각을 가질 때가 더러 있어, 불편한 말을 주고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단단한 인연으로 가는 작은 고비들이었다. 불편함이 지나고 나면 인연은 더욱 단단해졌다. 돌아가시는 전날까지도 함께 이야기했고, 인생의 마지막 인사도 나누었다. 스승인 일타 스님도 내게 전할 말씀이 있을 때마다 혜인 스님을 보내셨다. 혜인 스님은 원적에 드시던 날에도 평소처럼 “우리 스님(일타 스님)께 평생 시봉하고 잘 모셔 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고 하셨고,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대원성보살, 어른 보살로 잘 모셔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모두 그립다.

“길 없는 곳에서 참 생명의 길을 만들어 내며 무시무종으로 이 법에서 지옥 천당을 건설하고 혹 쳐부수기도 하면서 당당히 대우주의 주인공이 되나니.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을 발견하지 못하면 여의주의 주인이 되지 못하리라”

일생 수행과 포교에 매진했던 스님은 2016년 6월 23일 수선 안거 중 마침내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 62세였다.

1988년 해인사 지족암에서 일타 스님(우측 두 번째), 혜인 스님(좌측 두 번째)과 함께. 우측 대원성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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