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속 부처님 커뮤니케이션2

비유·이해 통한 쉬운 설법
말 속의 ‘덕성’ ‘인품’ 강조
긍정의 새 에너지로 전환

부처님은 비유의 대가이다.

부처님께서 비유를 사용한 이유는 근기에 맞는 설법, 즉 상대방이 알아들기 쉽게 하기 위한 자비스러운 마음 때문이다. 비유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를 빨리 하도록 도와주며 흥미있는 이야기로 들리기 위한 장치다. 실제 설법에서도 이러한 비유와 사례를 많이 들려줘야 한다. 그 이유는 상대에 맞는 배려심에서 기인하는데, 목적은 누구나 알아듣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말을 들어서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감동받고 마음 속에서 환희와 기쁨이 솟아나야 하기 때문이다.

듣기 좋은 착한 말을 하라.

마치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그는 모든 시비의 논의를 없애고

속세에서 벗어나 편안해지리라.

-<법구경(法句經)> ‘도장품(刀杖品)’-

또 부처님이 8정도에서 바른말을 말씀하신 데에는 말에 있어 경계해야함을 이른 것이다. 그 네 가지란 첫째가 거짓말, 둘째가 이간질, 셋째가 거친 말, 넷째가 쓸데없는 말이다. 말에 대한 경계가 워낙 크다보니 아예 말을 금기시하는 이상한 견해가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말은 중요한 것이니 만큼 제대로 잘하면 현실적인 이득과 실리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이 한 말씀이라도 그것에 집착하거나 머무르면 안 된다고 했다. 때에 따라서는 부처님의 말씀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거칠게 말씀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에 따른 전달은 있으되, 그것에 어떤 틀을 만들거나 형상을 지어놓지 말라는 당부가 여러 번 강조된다.

언로를 틔워야 순환이 되고 그래야 원활한 혈액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곧 부처님이 표현한 스피치로 전달된다. 부처님은 팔정도로서 살아가도록 말씀했다. 우리가 팔정도로 살아갈 때 인연 고리에 매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듯이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포교활동은 팔정도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듯이 내가 하는 말 한 마디는 일파만파로 주파수와 에너지가 되어 퍼져나간다. 따라서 자신의 잘난 척을 위해, 드러내기 위한 표현과 의도적인 신도수 늘리기 등의 목적으로는 포교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만 생길 수 있다. 포교의 선순환은 자기 기도와 자기 수행으로부터 우러나온 전달스피치에서 시작된다. 말하는 자의 덕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아무도 그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자비심이 드러나는 여러 종류의 비유는 그야말로 2600년 전이라는 세월을 넘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비유 자체로서도 충분한 교리적 품격이 느껴지며 시적인 가치도 빛이 난다. 이런 비유로 인해 우리는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곧바로 기억으로 저장되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생명력이 긴 이유도 바로 비유의 힘이다. 비유에 의한 이미지는 공감의 힘으로 작용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공감력을 던져줄 수 있다. 서로 통하는 의미로서 비유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다음은 <금강경>에 나오는 비유의 몇몇 대목을 제시한다.

- 허공의 끝없음을 보여주며 무주상보시의 무한한 복을 비유해 허공을 헤아릴 수 있는 지를 물으신다.(4분)

-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부처님말씀까지도 버리라는 과감성을 보여준다. 뗏목은 도강 후에는 버리듯 부처님의 설법도 버릴 수 있는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은 당연하다.(6분)

-삼천대천세계라는 표현은 무한우주 그 이상을 비유, 그러한 세계에 칠보의 보석으로 가득 채운다는 비유는 사람의 탐심으로, 이러한 사람의 복덕이 많겠는지 비유로 묻는다.(8분)

-깨쳤다라는 것은 드러낼 일이 아니며 어리석은 일이라는 비유를, 여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실제로 법을 얻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10분)

-마음이 곧 불국토임을 비유한 것으로 불국토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은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꾸민다고 말하기 때문이라는 대목이다.(10분)

-엄청나게 큰 수미산의 왕은 빈 마음으로 커진 것으로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비유했다.

‘어떤 사람의 몸이 산들의 왕 수미산만큼 크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이 크다고 하겠는가?’(10분)

-‘항하의 모래 수’에 대한 비유. 그 모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 이정도면 엄청난데 거기에 칠보를 가득채운다고 하며 한층 더 발전된 비유를 보여준다. 비유의 단계가 점진적으로 강해진다.(11분)

-대상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비유로서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보살이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은 마치 눈 있는 사람에게 햇빛이 밝게 비추면 갖가지 모양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14분)

- 삼천대천세계는 어마어마하게 큰 우주를 비유하는데, 그 큰 우주를 잘게 부수는 행위도 비유이다. 그리고 그 부숴서 나온 티끌... 이것도 엄청난 비유의 단계를 표현한다.(30분)

- 일체 모든 유위법이란 나의 분별, 망상으로서 이러한 것들은 모두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다고 비유한다. 일체 허망함을 알고 휘둘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32분)

이러한 부처님의 비유의 표현은 반복되는 것도 있고, 응축되어 나타나는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하되, 그 비유의 단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무한의 무한, 또 무한 등으로 점진적으로 커져가는 비유의 정도는 문학적 표현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상당히 시각적이다. 무한이라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상상하게 하면서도 그 상상을 나름대로 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 그 크기의 무한대, 그 무한대를 잘게 부순 미진들까지, 우리의 상상의 나래를 쥐락펴락하며 키우고 줄이고 어마어마한 광속도를 연상하는 천문학적 연출과 양자물리학적 시야를 무궁무진하고 자유자재로 연결시키는 디지털 그 너머의 초심성과학을 열어준다.

대화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불교경전의 대부분은 온통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방적인 강요나 명령, 연설이 아니다. 상대방의 질문을 듣고 그에 맞는 대답을 해주는 부처님의 독특한 설법스타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설한 게 없다’라고 못 박았다. 대화는 상대방과의 깊은 유대감을 유지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서로의 관계를 지속시켜나가는 일이다. 가까울수록 함부로 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대부분의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은 부처님제자에 의한 질문으로 법이 설해진다. 그 질문을 하는 제자는 몰라서나 궁금해서가 아니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말법시대 사람들을 위해 질문을 과감히 대신 한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수보리존자가 1250인을 대표해서 질문을 올린다. 수보리존자는 ‘평화롭게 머무는 자들 가운데서 으뜸’, 그리고 ‘공양을 받을만한 자들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부처님께서 칭해주셨다. ‘공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중국에서 후대에 ‘공’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평화롭게 머무는 자’라는 의미로 봐서, 불멸 후 법을 두고 다툼과 논쟁이 극심했던 <금강경>이 결집될 당시를 떠올릴 수 있다. 즉 싸우지 않는 자, 평화의 사도, 자비의 상징인 수보리를 등장시킨 이유이다.

이렇듯 수보리와 부처님 간의 아름다운 대화의 전 과정이 평화롭게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 <금강경>의 안심법문이다. 수보리의 대승적 차원의 질문과 부처님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하신 답변은 모두가 다 평화롭고 자비로움 그 자체이다. 수보리와 부처님의 질문과 대답의 커뮤니케이션으로 그 아름다운 만남과 대화의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금강경>은 한없이 평화롭고 자비로운 경전이다.

실제로 대화는 두뇌발달에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두뇌학에 의하면, 치매예방은 물론이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억력, 상상력을 유지하고 지식정보를 간직할 수 있는 전전두엽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 ‘대화’를 꼽는다. 대화는 사람 간의 공감능력을 키워주며, 교감과 교류로 상호연결, 지식의 정보전달, 몸과 마음의 일체성과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이 아름다운 대화를 보면서 자비의 설법을 깊숙이 느껴야 한다.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부처님

부처님은 온 우주의 모든 중생을 다 열반에 들게 하겠다는 선언으로 우리를 안심시켜 주며 확고한 불성을 선언했다. 아무리 말세라 해도, 선근을 심은 자들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금강경>을 독송하고 마음을 내면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는다는 문구들이 많다. 결국 성불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내려주고 있다. <금강경>은 현세적으로도 복 받는 방법, 재앙소멸을 말해주는 긍정의 경전이다. 누구나 깨칠 수 있고 더 이상 중생이 아님을 알라고 해주는 메시지다. 최고의 대안, 희망, 동기부여는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는 말씀으로 가슴 벅차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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