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명을 말하다

인연 지인 17명이 들려 주는
수좌 적명의 삶·수행이야기
큰방서 대중과 정진·운력해
“수행 따로 행 따로 안 된다”
평생 수좌 면모 지키며 수행
승단 위한 많은 불사에 헌신

적명을 말하다 / 유철주 지음 / 사유수 펴냄 / 1만5천원

 

“적명 스님은 한국의 대표 선승이셨습니다. 행(行)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후학 지도에도 힘을 다한 진정한 선지식입니다. 어떤 자리에서도 수좌들의 리더가 되어 주었던 적명 스님 같은 분이 앞으로 다시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힘든 시기에 한국불교를 이끌었고 수좌들에게 의지처가 되었던 적명 스님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원각 스님(해인총림 방장)

2019년 겨울, 홀연히 원적에 든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을 기억하는 글들을 모은 책이 나왔다. 책은 적명 스님과 인연이 깊었던 불교계 원로, 중진 스님 16명과 적명 스님의 속가 동생 김동호 거사가 수좌 적명 스님의 삶과 수행에 대해 들려주는 지난 이야기들이다. 적명 스님은 2009년 대중들의 조실 추대를 고사하고 봉암사 수좌로 들어갔다. 당시 스님은 “나는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조실 말고 수좌로 살겠다”고 분명하게 밝혔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조실의 자리도 고사하고 평생 큰방에서 대중과 함께 공부하며 평생 ‘수좌’의 이름으로 살았던 적명 스님의 생애를 들여다본다.

1939년 제주에서 태어난 적명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다르게 깊어진 철학적 사유를 끝내 놓지 못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스님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며 출가를 허락하지 않던 모친께 “그러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 묘를 모시고 나서 출가하겠습니다”고 했고, 마침내 모친으로부터 묵언의 허락을 받아 출가했다.

스님은 뭍으로 나와 나주 다보사 우화 스님 앞으로 출가해, 1959년 해인사 자운 율사로부터 사미계를 받았고, 1966년 역시 해인사 자운 율사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출가 전에 품었던 많은 물음의 답을 찾아 정진하던 중 관법수행을 만나 공부를 넓혔으며, 26세에 보조국사의 〈절요〉를 읽다가 “수행을 하려면 모름지기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는 구절을 만나 무자화두를 시작했다. 28세에 해인사를 찾은 스님은 해인총림이 개설되고 성철 스님이 50대 방장에 추대되어 선풍이 크게 일자 선풍에 모든 공부를 걸고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 선지식이었던 전강, 경봉, 성철, 서옹, 향곡, 구산 스님 등 문하에서 정진했고, 〈능엄경〉 42변마장의 내용이 낱낱이 사실임을 체험하고 화두선에 더욱 매진했다.

스님은 오로지 본분사에만 매진하고 선방 밖의 일에는 거의 마음을 두지 않았으나, 간혹 법을 묻는 이가 찾아오면 다양한 비유와 진솔한 설법으로 대중을 성불의 길로 이끌었다. 중도교의가 불교의 근본임을 설파했으며, 화두선이야 말로 중도를 바로 체험하고 깨닫는 지름길임을 강조했다. 설사 화두 타파를 하지 못하더라도 일상생활을 활기차게 영위할 수 있는 공능이 있다고 강조했다.

영축총림 통도사 선원 선원장, 고불총림 백양사 선원 선원장, 수도암 선원 선원장, 은해사 기기암 선원 선원장 등을 역임했고, 전국수좌회 공동대표를 맡았던 스님은 2009년 정월 구산선문 중 하나이자 봉암사 결사의 청정도량인 봉암사에 머물면서 대중의 추대로 수좌 소임을 맡은 후 입적하는 날까지 대중과 함께 정진, 운력, 공양하는 등, 수행자의 본분을 보였다. 평소 “수행자는 수행 따로 행 따로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지켰던 스님은 종단에 일이 있을 때면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때로는 행동도 불사했다. 그렇게 평생 수좌의 면모를 지키며 살았던 스님은 간화선 선풍을 진작하고자 2015년 선원수좌회와 공동으로 문경세계명상마을 건립을 추진했고, 수행자를 위한 ‘수좌복지회’ 불사를 회향했으며, 원로 수좌를 모시기 위해 봉암사에 원로선원을 건립하는 등 승단을 위한 많은 불사에도 헌신했다.

2018년 종단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하고, 2019년 12월 24일에 입적했다. 세납 81세, 법랍은 60세였다. 수좌로 살다 수좌로 가는 것이 꿈이었던 스님은 산이 좋아 평생 산에서 살다 산에서 떠났다.

“스님에 대해서는 여러 수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천상 수행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평생 수좌로서 열심히 정진했고 후학들을 잘 가르치려고 애쓰다 가셨습니다.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살아서 수행승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축서사 문수선원 선원장 무여 스님은 추천사에서 적명 스님을 ‘수행승들의 귀감’으로 적고 있다. 선원마다 참선의 열기로 뜨거웠던 1970~1980년대, 그 열기의 중심에 우뚝 서있었던 수좌 적명은 깨달음이라는 문턱 앞에서 항상 양심적인 수행자였다. 적명의 면모는 곧 수좌의 면모였다. 그의 모습이 곧 ‘책’이었다. 시절에 따라 수행환경이 변했지만 어느 자리에서도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수행에서 끝나지 않고 수행의 저변이 되었다. 무여 스님은 “이제 적명 스님이 떠나고 나니 한 사람의 수행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울림이 얼마나 큰지 새삼 알게 됩니다. 스님이 평생 힘써온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 그리고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에 대한 고민은 이제 우리들에게 남겨진 숙제라고 생각됩니다.”며 스님을 추억했다.

책 〈적명을 말하다〉는 60여 년 수행자로 자유인을 꿈꿨던 수좌 적명의 생애를 통해 오늘의 수행자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한다.

저자 유철주는 불교 언론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고 인연이 되어 많은 수행자들을 인터뷰했다. 이번 아홉 번째 책으로 적명 스님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적명을 말하다〉를 썼다.

1980년대 적명 스님은 홀로 양산 비로토굴에서 수행했다. 포행길에서 잠시 쉬고 있는 적명 스님.

수좌 적명을 기억하는 글들

“죽음보다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평생의 삶을 놓고 얘기를 해야지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요. 죽음의 형태는 몸뚱이를 버리는 방법의 차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적명 스님은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걸어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욱 존경합니다. 우리 시대에 스님 같이 고집스럽게 수행자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 계셨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역대 조사스님들 가풍이 적명 스님과 같은 분들 덕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훗날 사람들은 현대 한국불교에 적명 스님이 있었기에 행복한 불자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 혜국 스님(석종사 금봉선원 선원장)

“적명 스님은 수행의 모든 것을 체험한 납자이면서 이론에도 통달하셨습니다. 초기불교는 물론 대승과 선에도 매우 해박했습니다. 리더십도 뛰어났습니다. 대중들을 이끄는 힘이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강자들에게는 엄청 강하셨고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분이었습니다. 또 정의감도 대단해 교단의 모순이 보이면 발언하는 것을 서슴지 않으셨구요.”- 의정 스님(전국선원수좌회 상임대표)

“제가 죽비를 잡았던 철이었습니다. 해제 전날 자자(自恣)를 마치고 대중들과의 교감 끝에 스님을 큰방에 모시고 말씀을 올렸습니다. ‘대중의 이름으로 스님을 조실로 추대하겠습니다.’ 말씀을 듣던 적명 스님은 물러서지 않으셨어요. ‘고우 스님과 나는 이미 오래전에 조실 같은 소임을 맡지 않기로 약속을 했네. 만약 내가 조실을 안 해서 봉암사가 잘못된다면 하겠지만 우리 대중들이 이렇게 잘 사는데 그런 일이 있겠어?’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결국 스님을 조실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 영진 스님(인제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적명 스님이 수좌로 들어오시면서 봉암사는 종립선원(宗立禪院)의 면모를 다시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명실상부한 대중생활의 원형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이죠. 스님은 수좌로서의 자부심이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후배들에게 항상 ‘견성하지 못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화두를 놓지 말자.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는 당부를 끊임없이 하셨어요. 적명 스님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수좌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항상 원칙에 충실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좌 중의 수좌였습니다.” 원타 스님(해인총림 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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