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대상과 경계

“여러분, 그대들이 만약 법에 맞는 견해를 얻으려면 남의 속임수에 당해서는 안 되느니라. 안으로든 밖으로든 만나면 그냥 죽여 버려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며 부모를 만나면 부모도 죽이며 친척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 버려야 비로소 해탈을 얻을 수 있느니라. 어떤 경계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되어야 하느니라. 제방에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을 보면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찾아와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느니라. 산승은 이곳에서 처음부터 쳐버리느니라. 손에서 나오면 손으로 치고 입에서 나오면 입으로 치며 눈에서 나오면 눈으로 치나니 홀로 툭 튀어나온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느니라. 모두가 옛사람들의 쓸데없는 기틀의 경계에 놀아나고 있을 뿐이었느니라.”

서산대사가 지은 〈선가구감〉에 임제가풍을 나타낸 말이 있다. “맨손에 단칼을 들고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고 하였다. 바로 이 장에서 인용된 말인데, 부처와 조사는 물론 나한과 부모, 친척 권속까지 죽인다는 말이 나왔다. ‘법에 맞는 견해를 얻고자 할 때’라는 단서를 붙이고 한 말이지만 죽인다는 말이 등장하니 살벌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런 말은 선(禪)에서만 할 수 있다. 불교, 특히 선(禪)에서는 교조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서양종교와는 달리 교조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철저한 자기 독립이다. 〈임제록〉의 핵심어라고 할 수 있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나 ‘무의도인(無依道人)’은 어떤 상황설정의 위치가 없다. 나와 상대되는 어떤 대상을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설적으로 부처를 부처라 하면 부처가 아닌 것이다.

‘죽인다’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처나 조사에 대한 생각, 나한이나 부모 친척 권속에 대한 생각이 몽땅 끊어지면 죽여 버린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난 생각이 밖으로 객관 경계를 따라가 어떤 대상을 의식하게 된다면 이는 선(禪)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의식이 멈춰진 것이 선(禪)이다. 의식이 멈춰지면 부처도 없고 찾을 것도 없다. 그냥 마음인데 부처와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러나 이를 모르기 때문에 부처 찾는 사람들을 위해 ‘마음이 부처’라 한 것이다. 선가에서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는 말은 마조 도일(馬祖道一ㆍ709~788)이 처음 썼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스님이 마조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왜 마음이 부처라 하십니까?” 답하기를 “우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다”, “울음을 그치고 나면 뭐라고 하실 겁니까?”,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전등록〉에 나와 있는 말이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장님에게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혹 눈을 수술하여 시력을 회복하는 수가 있다. 그때는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달을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속에 우화 한 토막이 나온다. 눈이 먼 장님이 지팡이 끝을 의지하여 자기 집을 나와 꽤 먼 길을 갔다. 눈이 멀어도 특이한 감각이 있어 지팡이로 더듬으며 천천히 길을 가는 수가 있었다. 먼 곳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변이 생겼다. 장님의 눈이 번쩍 떠져 버린 것이다. 이젠 정상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눈이 떠진 장님이 어리둥절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팡이 끝으로 더듬어 올 때는 올 수가 있었는데 눈을 뜨고 난 후에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음의 눈을 뜨는 데는 망념이 걷히어야 한다. 번뇌에 덮여 있는 마음은 구름 낀 하늘과 같아 본래의 청명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부처나 조사 혹은 아라한이나 부모를 의식하여 생각이 관념을 만들고 있으면 병든 눈이 허공의 꽃을 보는 것과 같이 된다 하였다. 그래서 임제는 버리라는 말을 죽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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