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금강경 속 부처님 커뮤니케이션 1

중생을 대신한 수보리 질문
대중 위한 대승불교의 상징
부처님 자상하게 이름 불러
친밀함 속에 전법포교 강조

수보리 질문으로 부처님 말씀 시작되다

질문은 상당히 고조된 스피치의 방법이다. 질문은 내용을 잘 파악하고 깊이 숙지하고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혀 알지 못해 당황해 하거나 어리둥절해서는 제대로 된 질문이 나올 리 만무하다.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는 분과를 나누어 각 분(分)마다 적절한 제목을 붙였다. 이 때 소명태자는 수보리 등장분에서 그를 ‘선현(善現)’이라고 표현했다. 선현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듯 수보리는 도덕성과 지혜에 있어 훌륭하고 모범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수보리는 중생을 위한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대신해 질문을 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는데, 이로써 〈금강경〉이 열리는 순간이다. 수보리의 대자비심의 발로가 바로 대승의 멋진 모습이다. 굳이 내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항상 했던 것처럼, ‘오늘도 공양하고 수행하면 그만인데, 왜 괜히 질문을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소승의 마음이다. 따라서 진정한 대승의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름 불러주는 자상함과 칭찬

〈금강경〉은 대승불교의 진수, 에센셜 경전이다. 따라서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게 압축 정리, 정화된 대표적 대승경전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심사숙고해서 번역했을 구마라집을 떠올려 본다면, 괜히 끼어 넣을 단어는 한 글자도 없었을 것이다. 고대의 번역의 잣대인 ①신(信:원전에 충실해야한다) ②달(達: 내용에 통달하여 표현이 뚜렷해야한다) ③아(雅: 번역된 글 자체가 아름답고 우아해야한다. 즉 문장의 문학적 경지를 드러내야 한다)인 이 세 박자가 아름답게 조성된 것으로 평가받는 구마라집이다. 그가 쓸데없는 말을 넣었을 리가 없다. 그런 면에서, 부처님은 수시로 수보리의 이름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수보리야, 수보리야, 다시 또 수보리야…, 왜냐하면 수보리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보리야, 여래께서 다 아시고 다 보시나니, 이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느니라. 수보리야…….’

이름을 불러주는 것의 의미는 아주 지대하다. 상대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이며 상대와의 친밀감의 표현이며, 상대를 포용해주는 느낌까지 받는다. 곧 상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며 존재의미를 깨우쳐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름 자체가 그 사람의 본연이 아니다’라는 불교수행적 의미는 잠깐 제쳐두고 이야기하자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인정과 관심을 온통 쏟고 있다는 신호이자 의미이다. 부처님의 따뜻함이 묻어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름만큼 아끼지 않는 부분이 부처님의 풍부한 칭찬스피치다. 부처님은 이 금쪽같은 〈금강경〉의 문자들 가운데 칭찬의 문구를 보면, 압축의 대가인 구마라집도 이를 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선재선재라 수보리야’ 현대의 스피치는 감성의 스피치 시대이다. 사람의 감성을 어루만져주는 스피치를 지향한다. 따라서 밝게 웃고 명랑하게 말하는 이런 에너지 파동을 서로 전달해야 한다. 그것이 불교의 맥과도 상통한다. 과묵하고 무표정을 일관하고 가볍게 웃지 말고 등, 이런 부류의 고정관념이 사회를 정체시키고 불교를 무겁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불교집안에서는 칭찬이나 상대에 대한 관심표명이 희박한 것 같다. 희로애락을 표현하지 않아야 도인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있는 것 같다. 또한 구마라집 답지 않게 왠지 쓸데없을 것만 같은 표현을 자주 쓴 것 중의 또 하나는 부처님의 맞장구다. 이는 꽤 여러 번 나오는데 그만큼 부처님은 상대를 향한 스피치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전을 보면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이런 표현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수보리의 대답에 힘을 주고 있다. 부처님의 자상한 말씀과 사람에 대한 대우에 대한 기록 또한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며 부추겨주는 것으로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것 만한 것도 없다. 이 짧은 한 마디가 상대방을 크게 격려하고 고무시켜주는 힘이 있다. 우리가 내 주변인과 대화할 때 상대를 북돋워주고 존중해줘야 할 이유는 충분히 많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주변이 혼란스럽고 저마다 힘들어할 때에 더욱더 불교는 친밀성으로 다가가야 한다.

포교와 전법 공덕 강조하는 부처님

경전에서는 전법의 공덕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 보시한 공덕보다 더 큰 보시이며 공덕이라고 강조하는 부분은 아주 많다. 우리가 포교와 전법에 마음을 쏟아 이 자체를 공덕이며 보시로 생각해야할 부분이다. 자기 기도에만 함몰되지 않고, 내 마음 한자리 밝힌다는 것은 곧 주변과 사회, 온 세상을 밝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내 마음을 밝혀 환하게 하면서 포교의 마음, 즉 자비심을 함께 밝히는 것이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포교는 항하의 모래수보다 더 큰 공덕이라고 누차 말씀하시며,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가 다 알고 다 본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포교와 전법에 대한 강조는 여러 번 나오되, 각각 다른 비유와 표현으로 강조해 나가고 있다. 포교와 전법의 복덕과 공덕은 최승제일의 보살이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똑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이유도 부처님의 자비심의 한 면을 볼 수 있다.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지루하지 않게 다른 비유로 바꿔가면서 말하고 있다. 자칫 〈금강경〉은 공의 대표적인 주자로서 ‘말은 필요 없다’로 잘못 생각하는 시각도 있었다.

부처님 만의 스피치 특징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이라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고, 또한 여래께서 설한 단정적인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한 법은 모두 얻을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성현들이 다 무위법 속에서 차이가 있는 까닭입니다.’(제7분)

〈금강경〉 7분의 타이틀은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으로,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라고 되어있다.

즉 설(說, 스피치)에 대한 집착을 우려하고 있다. 부처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상대에 맞게 그때 그때 맞는 설법을 해주기 위해 정해진 것이 없다고 했을 뿐, 말하지 말라는 아니다.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 만이라도 받고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제8분)

명쾌한 문구다. 사구게 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라는 당부와 명령이다. 전법과 포교에 대한 반복된 강조가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뒤에 나오는데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체 모든 상을 끊고 타파해야 함을 당부한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색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하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땅히 집착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제10분)

말하기 전에 먼저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함을 일어준다. 아무런 분별심. 상이 없는 것이 깨끗한 마음인데 이러한 마음이어야 제대로 된 스피치라 한 것이다. 입술 끝으로만 단련된 스피치로 청산유수같이 내뱉는 것이 스피치가 아니다. 마음수양이 되어, 깨끗이 청소하고 비워내고 나서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상에 가득 차있어 말하는 것은 오히려 구업을 만드는 격이다. 따라서 마음이 청정해서 스피치를 해야 진짜 장엄정토라 할 수 있다.

‘수보리여, 여래는 바른 말을 하는 이고, 참된 말을 하는 이며,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이고, 속임 없이 말하는 이며, 사실대로 말하는 이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제14분)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인 8정도 중 정어(正語)를 강조한다.

‘어떻게 남을 위해 설명해줄 것인가? 설명해준다는 관념에 집착하지 말고 흔들림 없이 설명해야 한다.’ (제32분)

〈금강경〉의 클라이맥스다. 결국 수지 독송도 중요, 이해하는 것도 중요, 남에게 설해주는 것도 중요한데, 어떻게 설하는지에 대한 안내를 해주고 있다. 상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을 전해주고 설할 수 있으면 수승하다고 했다. 이점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상이 없이 전하라. 그러면서 ‘관’하라고 한다. 내 스스로 관해야 올바른 표현이 나올 수 있으니 언행일치를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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