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뿌리를 자기가 안 믿으면 누굴 믿을 겁니까!

일할 때나 잠잘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항상 자기 뿌리를 잊지 않을 것을 자기 뿌리에 맹세하는 반면에
???????자기 싹은 열심히 뛰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공양 올리는 마음

질문 : 우리가 보통 정성을 들인다고 하면서 부처님 전에 공양미나 초 또는 꽃 등 가지가지 공양물을 올리게 되는데 그럴 때 어떤 마음으로 올려야 하는지요.

답변 : 이 공양이라고 그러는데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속에 사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공생이면서 공심이고, 공심이면서 공체고, 공체면서 공용이고, 공용이면서 공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한테 올리는 것도 공심으로서 해야 공덕을 받죠. 공심이 아니라면 공덕이 안 됩니다. 달마 대사가 양 무제더러 공덕이 없다고 말한 원인도 거기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접시의 물 한 그릇 가지고도 영령들의 큰 목욕탕이 될 수 있고 꽃 한 송이 가지고도 영령들의 집합소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공양이에요. 꽃공양, 향공양, 모두가 공양! 그래서 이 공양을 정말 알고 내려 먹는 사람은 그건 제 밥 제가 내려 먹는 거고, 알지 못하고 그냥 부처님 밥 먹는 사람들은 그건 자기 밥을 자기가 내려먹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절에서 공양 올린다 하는 것도 이게 전부 도의 길입니다. 그 뜻이 뭔지 모르니 걱정이죠. 그러니까 모두가 공해서 공한 마음으로 공양을 올려야, 이게 한마음으로서, 공심으로서 공양을 올려야 공덕이 되지, 공심이 아니고 그냥 갖다가 내 아들 내 남편 잘되게 뭐, 그러니 이게 적용이 되겠습니까. 이게 공덕으로 적용이 되느냐 말입니다.

이 마음도 그래요. 쌀을 갖다 놓고 초를 켜고 그럴 때 벌써 이 촛불을 켜는 게, 내 마음의 불을 켜고 나면 내 이 몸이 타서 깎아지는 듯한 그 애처로운 그 마음으로, 그 공심으로서 공양을 올려야지, 부처님께서 공심인데 내가 공심이 아니면 어떻게 맞아 들어가겠어요?

이 발우공양도 공양이라고 그러죠? 왜 공양이라고 그랬느냐. 스님네들만 앉아서 먹는 게 아니잖아요. 스님네들은 곤충의 바가지예요. 중생들의, 즉 말하자면 주머니들이란 말입니다. 그 주머니 구멍 뚫린 데로 그거를 넣어요. 주머니 구멍 뚫린 데로 넣는다고요. 거기서들 죄 제가끔들 모두 먹는 겁니다. 그러고 자라죠.

그러면 어떻게 자라느냐? 이 사람 하는 행동 따라서 그 의식도 다 거기에 따라서 가거든요. 먹기 싫어도 주는 대로 먹는단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라는 것도 없고 그냥 살았으니깐 살기 위해서 우리 먹는 거죠. 그런데 그게 주머니라는 걸 몰라요, 모두. 곤충의 주머니라는 걸 하나도 납득을 못 해요. 그런데 그 구멍 뚫린 데다가 넣어 주는데 어떻게 내가 먹는 겁니까? 이 주머니가 먹는 겁니까? 이 주머니 속의 곤충들이 먹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악의 독이 있는 곤충의 주머니냐, 독이 없는 곤충의 주머니냐, 여기에 따라서 또 많은 문제가 생기죠. 저 독이 있는 주머니에서는 독성이 생산이 되는 거고 독이 없는 주머니에서는 독성 있는 데 잡아먹히고 이러더라도 선의가 발생되는 거고 그런 거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을 하죠. “정신계에서 정신을 뺏어 먹고 사는 거니깐 정신을 뺏기지 않으려면 정신계의 내 주인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이런 거요. 정신을 뺏어먹고 정신을 뺏기고 이렇게, 육이 있는 거는 육을 뺏어먹고 죽이고 살지만 이 사람들은 정신을 뺏기고 그때서는 껍데기만 왔다 갔다 하다가 그냥 스러지는 거죠. 이게 현실이에요. 그냥 옛날 얘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와 같이 우리의 곤충의 주머니를 다 벗어 버리기 위해서 모든 거를 나 자체가, 내 생각 자체가 그대로 놓고 가야 한다. 그대로 남을 섭섭지 않게 해야 한다. 말을 항상 조심해서 그냥 해야 한다. 똑같은 말이라도 말을 성을 내고 하면 저쪽도 감촉이 좋지를 않거든요. 그러니까 이 곤충이 빨리 이게 진화되지 않죠. 그래서 이것이 빨리빨리 되려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 한다 이겁니다.

하여튼 여러분을 이 사람으로 치지 마시고 곤충의 주머니로 치시고 항상 그 곤충 주머니나 곤충이나 둘이 아니고, 모두가 둘이 아니라고 생각을 할 때에 바로 믿어지는 게 있어야만이, 그 믿어지는 거 그 방망이 하나면 이 온 우주를 때려잡고도 남음이 있어요. 이 방망이, 주인공이라는 자기 뿌리인 불성 말이에요. 그러니 어찌 이 마음공부를 안 할 수 있겠습니까.

습 하나를 녹이는 것도 어렵습니다

질문 : 우리는 일반적으로 살아오면서 자기가 쌓아 놓은 습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음공부를 하면서 나에게 들어 있는 습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녹여 가려고 하고 있지만 습 하나를 녹이는 것도 너무나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답변 : 요새 난 “여러분이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부자유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거를 생각할 때 너무나 딱해서 기가 막힐 때가 많아요. 참,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창살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창살 속에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면서 구속을 받고 살고 있나.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폭넓게 생각을 해 보십시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체 천차만별의 사생(四生)들, 그 모두가 어떻게 살고 있나? 천차만별의 사생들이 모두 자기가 살아온 습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왜 벗어나지 못할까요?

한 가지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연어인가, 은어인가? 하여튼, 왜 그것은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떠나서 세상천지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서는, 자기 모습을 형성해 놓고 자기는 없어지는 그러한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쉴 사이 없이 하게 될까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우리의 모습들로 인해 먹히고 먹고 살아온 그 습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습이 쉴 사이 없이 반복되는 반면에, 누적이 되고 누적이 되고 그래서, 하여튼 그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려고 한 번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 그대로만 따라갈까요? 그대로 따라가더라도 우리 마음은 발전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마음의 발전이 있어야만이 우리의 삶도 발전이 생기고, 또는 발전이 생기는 반면에 창조력이 생기고, 창조력이 생기면 물리가 터지고, 물리가 터지면 지혜로워지죠, 마음이 넓어지고. 그래서 우주 천지를 곳곳마다 심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죠.

그런데 모두가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형상 아님이 없는데 모든 거를 밟고 먹고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도리를 다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법은 없을까? 그래서 삼천 년 전에 부처님께서 그 뜻을 일러 주셨고 지금까지도 일러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도리를 깨달았다 해도 각각 있는 게 아니에요. 이 도리를 자세히 들으세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무리 많이 마음을 통해서 들어와도 두드러지지 않고, 여러 부처님들의 마음이 여기를 통해서 바닷물 내놓듯이 다 내놔져도 줄지 않아요. 이렇게 광대무변하고 묘한 도리가 우리들에게 다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도 관습에, 습에, 인연줄에 매달려서 그냥 꼼짝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한 식구, 부부, 자식이다 할지라도 그 자식들의, 부부의 몸을 붙들고 매달리지 말고 만약에 그 마음을 둘 아니게 놓고 슬기롭게 굴린다면 몸은 저절로 붙들어지고, 사랑은 저절로 화(化)해서 자비의 정이 되어서 뗄래야 뗄 수 없이 이어져 가면서 더불어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묘법이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구에 붙어서 사는 사람 벌레는 화해서 한 발을 떼어 놔야만이 이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래야만이 자유자재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이 내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가 있는 평등봉에 같이 한자리를 할 수 있어서 여래 자리라고 하죠.

우리가 옷을 벗었다고 해서, 이 모습을 벗었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에요. 옷을 벗으면 자기 차원대로…. 아니, 내가 테레비를 보니까요, 배를 갖다가 놓고, 같은 배인데도 크고 작은 것을 가리려고 기계에 넣고선 굴러 떨어지게 합디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굴러 떨어지게 해요. 그렇게 해서 같은 배건만 크고 작은 걸 가려 내더라구요. 그러고는 작은 건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중간 것은 중간 것대로 놓고 팝디다.

그러니 천차만별의 그 모습들을 죄들 각각 놓고 우리가 경쟁을 하고 있는 거죠. 바로 여러분이 살아온 습, 그 습으로 인해서 오는 인과, 인연에 따라서 인과가 되는 거니까, 그것이 업이 되는 거죠. 이게 악업이 되느냐 선업이 되느냐. 사랑을 하다가도 어떠한 문제 때문에 헤어지면 악업이 되죠. 선업이 그냥 순간에 악업이 돼 버리고 말죠.

그러니 이 악업 선업이라는 자체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짐작도 못 하실 겁니다, 아마. 여러분 몸뚱이 속에 다 들어 있어요. 가지각색의 모습을 해 가지고, 의식을 가지고, 하나도 벗어날 수가 없는 그 업식의 굴레에서 그냥 그대로, 컴퓨터에 넣으면 그대로 나오듯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업식이 딱, 아주 기정사실로 들어 있거든요. 그렇게 뺄래야 뺄 수 없고, 끼울래야 끼울 수 없이 그대로 입력이 돼서 그렇게 나오는 것을 팔자 운명이라고 하죠. 그리고 영계성·세균성·윤회성·업보성·인과성 이 모두가, 거기에 속해서 나오는 것이 전부 몸 안에 들어 있어요. 부인 못 할 겁니다, 아마.

그래서 나로부터 이 세상이 벌어졌고, 나로부터 상대가 생겼고, 나로부터 업식이 있는 거니까 내 탓으로 돌리라고 하는 거죠. 묘한 거는,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다는 겁니다.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어요. 인과라든가 유전성이라든가, 세균성, 업보성 또는 영계성까지도 모두 종합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과가 되는 거죠. 그래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 겁니다.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입력이 된 대로 여러분을 지금 이끌어 가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아주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게 녹음이 돼서, 입력이 돼서 나오도록 되어 있는데, 사실 그대로 입력이 돼서 나와요.

그렇다면 이 입력된 것을 어떡하면 없앨 수 있을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입력이 된 데다가 되입력을 하면 앞서 입력된 것은 없어지는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렇게 빨리 인식이 되고 동감이 될 수 있도록 얘기해 드리는 겁니다, 지금. 그러니까 그 속에서 그냥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나오는데 거기에 말려서 그것이 습성으로 돼 버리고 말았죠. 그렇게 모두 살아나가고 있죠. 그런데 “그 자리에다가 믿고 되놔라. 제 나무는 제 나무뿌리를 믿어야 되느니라.” 했습니다.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수분과 에너지를 흡수해서 모두 올려보낼 수 있어서 나무가 푸르르게 살 수 있는 것이지, 남의 뿌리 남의 나무를 믿고 잘 살게 해 달라고 아무리 빌어도 그건 기복이며, 그건 이익이 하나도 가지 않는 것이며 공덕이 될 수가 없죠.

그러니까 하시라도 마음을 넓게 가지면서 거기다가 놓으세요. 어떠한 꿈을 꾸었다든가, 상대가 어떠한 문제로 인해서 잘못돼 돌아갈 기미가 보인다든가, 나를 그냥 꼭두각시로 만든다든가, 또는 적대시한다든가 이런 문제들이 허다할 겁니다. 그렇게 될 기미를 알게 되면, “너만이 그렇지 않게 할 수가 있잖아! 그 마음들과 둘이 아니게 내 마음으로 쓸 수 있게끔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모든 것을, 신호를 거기다 맡겨 놓을 때에…, 이건 의학적이기도 한데, 대뇌를 통해요. 그리고 그다음에 소뇌를 통하고 중뇌에서 결정을 지어요. 결정을 짓게 되면 하달이 돼요. 사대(四大)로 통신이 돼요. 통신이 돼서 제각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그때는 뛰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안과 밖으로 다 뜁니다. 그래서 내면의 절차가 다 잘되어 있어야 외부의 절차가 다 잘된다 이런 말입니다.

이 몸뚱이가 배라면 내 마음의 선장이 그 자생 중생들을 다 태워 가지고 지금 다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몸 안에서 의식들이 내 마음 채찍의 다스림에 따라 나가서 마음도 조절하는데, 나쁘게 조절하느냐, 평화스럽고 아주 좋게 해결사로서 조절을 하느냐 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이건 기정사실이에요.

살기가 막막합니다

질문 : 요즘은 살기가 참 막막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조그맣게 운영하던 장사도 문 닫을 지경에 이르러서 쪼달리는 살림에 불안하기만 합니다. 주인공에 맡기고는 있지만 믿음이 부족한지 의욕이 안 생기고 마음이 우울해지기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고 갈 수 있도록 한 말씀 일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 여러분이 진짜로 자기를 믿고 절감을 해야 되는 거지, 그걸 내가 말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죠. 아주 급박할 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그 심정이 돼야 겨우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믿고 그 자리에 놓게 되는 거죠. 어떨 때는 외국 지원에 계시는 신도들이 절박하게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알았어. 절박한 만큼 간절하게 관해 봐!” 그러면 그 이튿날이고 전화가 또 뚜르르 옵니다. “해결되었어요.” 하거든요.

그래서 감사하다고 그러면 나는 그럽니다. “네 전깃줄과 내 전깃줄이 둘이 아닌 까닭에 불이 들어왔을 뿐이다. 내 전깃줄은 제일이고 네 전깃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의 전깃줄과 내 마음의 전깃줄을이 같이 합쳐졌으니까 불이 들어온 거다. 그러니까 내가 낫게 한 것도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역시 진정으로 믿고 그렇게 하면…. 자기 뿌리를 자기가 안 믿으면 누굴 믿을 겁니까? 이름을 믿을 겁니까, 형상을 믿을 겁니까? 또 스님들을 믿을 겁니까? 어떻게 할 겁니까? 자기를 이끌어 가는 진실한 자기를 믿어야죠.

그러니까 우리가 좀 더 생각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생각해서, 일을 할 때나 잠을 잘 때나, 또는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항상 자기 뿌리를 잊지 않을 것을 자기 뿌리에 맹세하는 반면에 자기 싹은 열심히 뛰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내가 예전에 이런 말을 했죠? 부처님이 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할 테니 너는 뛰어라.”라구요. 그 말이 그냥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지금 그렇게 하고 가시는데 여러분은 패기가 없어서 과감히 뛰어넘을 줄을 모르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더 있다 죽으나 덜 있다 죽으나, 이따 죽으나 또 먼저 죽으나 죽는 것은 똑같아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뭐가 두려워서 뛰어넘질 못합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마음인데 말입니다. 죽으나 사나 뛰는 마음 자체가 바로 피안으로 넘어서는 도리입니다. 한 생을 살면서 ‘이거를 이렇게 하면 어쩌나, 저렇게 하면 어쩌나’ 하고 망설이기 때문에 넘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사적으로 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 결사적으로 이 도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왜인가? 여러분이 각각 소임을 따로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교직이면 교직, 회사원이면 회사원, 장사면 장사 이렇게 제가끔들 다 가지고 있는 그 소임에 따라서 터득을 하면 그게 개척이고, 그게 계발이고, 그게 바로 나를 내가 승화시키는 길입니다. 억지로 높은 자리를 뺏어서 올라갈 양으로 애쓸 필요 없이 자기가 맡은 소임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누구나가 다 그렇게 해 나가야 발전이 있는 겁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마음의 발전을 말합니다. 마음이 발전이 되면 스스로 행도 발전하게 되므로 그것은 바로 여러 사람들에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또 천차만별의 소임이 발전한다면 그 뒤에 발전을 못 하고 가는 사람들도 덩달아 다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못 먹고 굶주린다고 해서 나의 자부처를 탁탁 털어내 버리려고 애를 쓰지 마세요. 내가 과거에 그렇게 남을 못살게 해서 지금 못사는 거니까 그 뜻을 아시고 ‘그렇게 못살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못살게 된 원인이 거기에 있으니까 내 탓이다. 수행해서 이걸 다 녹이리라.’ 하고선 모든 걸 거기다 놓아 나가야 하는 겁니다. 거기다 놓기만 하면 없어지는 겁니다. 조금도 에누리가 없거니와 조금도 허탕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이런 말을 하죠. 주인공에 놓고 진짜로 믿는다면은 거기서 보디가드도 돼 줄 수 있고 해결사도 돼 줄 수 있다구요. 해결사가 돼 준다고 해서 잔뜩 잘못해 놓은 거를 금세 없애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또한 다 녹이고 끈기 있게 나갈 수 있는 길을 인도하는 그런 위치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대충대충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이것도 내가 한 게 없이 부처님께서 하신 거죠.

우리가 살면서 더불어 함께 도반으로서 모든 것을 이렇게 배우고 나간다면 요다음 생에 어떠한 차원으로 나와도 여러분이 낳아 놓은 자식들도 염주알 꿰지듯 따라서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잘못해도 같이 따라 들어가고 잘해도 같이 따라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내생이 따로 있고 현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얼마 안 가서 내생이 되고 현생이 됩니다. 그러니 거리가 멀지 않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도 변치 않고 주인공에다 모든 걸 몰아서 한도량에 한마음으로 넣고, 일체제불과 한마음이 돼서 우리가 결산을 본다면 크게 이룰 겁니다, 아마. 허공에 꽃이 피어서 그냥 비 내리듯 말입니다.

부모님 봉양 잘하고 싶은데

질문 : 예전에는 인간이라면 효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 시대 사람들은 너무 개인주의에 빠져서 부모님 모시기를 다 꺼려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만 해도 절에 못 나가게 하시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좀 심한 편이거든요. 어떻게 하면 부모님 봉양을 지혜롭게 잘할 수 있을까요?

답변 :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예요. 우리가 신도님들이 가끔 이렇게 주지 스님도 만나러 오고 나도 만나러 오고 이렇게 하시는데 우리가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만나면 얼마나 즐겁겠어요, 걸림이 없이. 그런데 그걸 진실히 하질 않고 가면적으로 하니까, 가면이 아니라고 하지만 벌써 하시는 거 보면 알거든요. 밑에 앙금이 가려서 그렇게 안 되는 걸요. 그럭할 때는 “아, 진짜로 믿고 하면 된다니까 왜 안 믿고 그래?” 그러죠.

이 공부도 그렇고, 살림살이도 그렇고, 배움도 그렇고 모두가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공부 해 나가는 사람들은 다 잘 모시게 돼 있어요. 그거는 뭐, “이거 모셔야 된다. 공양을 잘해야 된다.” 이런 게 없어도 스스로서 잘 모시게 돼요. 하나에서 다 나오는 건데요, 뭐.

그런데 이렇게 밤낮이 있죠? 이렇게 잘되다가도 안되는 때는 바로 밤낮 이거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낮만 알고 밤을 모른다면 에너지가 부착이 되질 않아요. 그러니까 밤낮이 둘이 아니게 도는 줄 알아야 되겠기에 그것까지도 마저 가르침을 받아야죠. 그건 스스로서 내면에서 그럭하는 거니깐 ‘아, 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내면에서 주인공이 밤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 정신계의 50%를 진짜 가르치기 위해서구나.’ 하고 그럭한다면 그냥 그 동시에 풀리죠. 없어지죠, 그게, 그러니깐 그것도 아셔야 하고 저것도 아셔야 하고 그렇습니다. 가시다가 개천이 있으면 건너뛰어서 갈 줄 알아야 된다 이 소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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